INTERVIEW
퍼플레이가 만난 사람들
[필름X젠더] <육상의 전설> 김태은 감독 인터뷰
“응원하는 영화”
퍼플레이 / 2025-08-29
2025년 양성평등주간 온라인 상영회 [잇-다, 평등을 비추는 스크린]을 기념하여 필름X젠더 감독들의 인터뷰를 공개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뒷이야기를 통해 영화를 보며 궁금했던 지점들이 해소되기를 바랍니다 :) *해당 인터뷰는 2021년 9월, [필름X젠더] 단편영화를 활용한 성평등 교육 안내서 제작을 위해 진행되었습니다. |
Q. <육상의 전설>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실제 이모를 모델로 삼았다고 들었는데.
A.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필름X젠더’에 지원하기 위해 스토리를 구상하다가 예전에 썼던 수필을 떠올렸다. 학교의 영화학과 내 성평등위원회에서 학생들의 글을 엮어 문집을 냈는데, 나는 문정희 시인의 <그 많던 여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라는 시에 감명받아 글을 쓴 게 있다. 그래서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고, 그 글에 이모를 접목하게 됐다.
Q. 극 중 우리와 이모 사이에는 유대관계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도 이모와 친하진 않았나.
A. 이모가 살아 계셨을 때 거의 세 마디도 안 해본 것 같다. 만나 뵌 적은 많았지만 대화를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이모가 돌아가신 지 2~3년 정도 됐는데 60세가 안 돼서 돌아가셨다. 우울증을 앓았고, 술이나 약에 늘 취해 계셨다. 체중도 많이 나가셔서 거동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중학교 때 전국체전 2등이었다고 하니까 상상이 안 되더라.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됐지?’ 싶었다. 내가 그분의 인생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자기의 삶을 긍정하면서 사는 것 같진 않았다. 현재의 삶과 전혀 매치가 안 되는 과거였기에 충격이 컸다. 그런데 더 충격이었던 건 “옛날엔 다 그랬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엄마였다. 그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Q. 이모가 생전에도 “왜 고등학교 안 보내줬냐”는 말을 했었나.
A. 다른 이모들을 인터뷰할 때 들었다. 외할머니 장례식장에서도 그 말을 했다고 하더라. “내가 공부도 잘해서 이화여고 붙었었는데 왜 안 보내줬냐”고. 영화를 준비하면서 내가 이모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알았다. 춘희의 대사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왠지 내 마음대로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다른 이모한테서 그 말을 들은 거다. 덕분에 이모 이야기를 왜 해야 하는지, 이모에게 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확신을 갖게 됐다.
필름X젠더 제작지원작 <육상의 전설> 스틸컷
큰 외삼촌: 여자 형제 많은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많은 것을 누려왔고, 머리 한 번 조아리지 않았을 사람이다. 그런 태도가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기본적으로 바쁜 사람이다. 사는 것도 바쁘고, 장례식장에서도 혼자 일을 하고 있지 않나.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나 상황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춘희: 천덕꾸러기. 말썽을 피워서 미움을 받는 게 아니라 그냥 예쁨을 받지 못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형제들 중 딱 가운데 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여자애.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집안에선 지원해줄 의향도 여력도 없어서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고 사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Q. 우리 캐릭터를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A. 우리는 씩씩한 사람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에 대한 서사를 보완할까 싶기도 했다. 가령, 우리도 이모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거나 하고 싶은 게 있지만 못했던 경험이 있다거나. 영화에 우리가 ‘K-장녀’로서 힘들어하는 부분이 간접적으로 드러나는데, 그걸 아예 직접적으로 보여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꿈을 포기하고 산 여자의 이야기는 오래된 이야기이지 않나. 그래서 이 이야기를 지금 해야 한다면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연이나 아픔이 있지 않아도, 다른 여자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요즘의 청년 여성들은 마음이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설득력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그런 서사 없이 만들어보고 싶었고, 사소한 계기로도 마음이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Q. 우리가 춘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주저 없이 내달렸던 이유와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다.
A. 어린 춘희가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신발을 정리하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움직일 것 같았다. 운동화는 춘희에게 굉장히 소중한 건데 외삼촌(춘희의 오빠)은 그걸 밟고 지나가 버리잖나. 너무나도 쉽게 무시당한 거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우리가 분노를 느낀 거다.
Q. 춘희가 육상선수의 꿈을 이루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만 극적인 변화를 맞진 않는다. 그렇게 춘희의 삶을 마무리한 이유는 무엇인가.
A. 처음부터 결말은 ‘그럼에도 바꿀 수 없다’라고 정해놨었다. 현실은 쉽게 바꿀 수 없지 않나. 그리고 삶을 바꿔주는 것이 그 사람을 존중하는 길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드라마틱한 변화를 주는 건 아예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자매들끼리 재미있게 잘 살았다’ 정도로 끝을 맺어주고 싶었다.
필름X젠더 제작지원작 <육상의 전설> 스틸컷
Q. 가부장제, 여성의 삶, 꿈, 연대 등 영화를 통해 다양한 키워드를 도출해낼 수 있는데, 특히 어디에 방점을 두고자 했나.
A. 그 키워드들이 영화에 다 들어있는 것 같다.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응원하는 영화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모를 계속 응원하는 느낌이 있고, 마지막에는 춘희가 우리에게 ‘잘 살아봐. 너의 삶을 응원할게’라고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관객들도 우리의 ‘달리기’를 응원하게 되고, 이모의 인생이 달라지기를 바라게 되잖나. 그래서 응원하는 마음이 들어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Q. 마지막 장면에서 춘희는 우리에게 말없이 바톤을 넘겨준다. 어떤 마음으로 건네준 것이라고 생각했나.
A. ‘고마워’ 정도였다. ‘나를 위해 마음 쓰고 달려줘서 고마워’라고 했을 것 같다.
Q. 춘희에게 한 마디 해준다면 어떤 말을 건네주고 싶은가.
A. ‘너 잘 살 수 있어. 잘 할 수 있어.’ 우리가 하는 대사의 연장선이기도 한 것 같다. 우리가 춘희에게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너만 생각하고 살아”라고 하는데 특히나 예전에는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게 어렵고 두려운 일이지 않았나. 근데 춘희는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머리도 좋은 사람이니까 진짜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혼자서도 믿음과 확신을 주고 싶다.
필름X젠더 제작지원작 <육상의 전설> 스틸컷
Q. 이 영화를 어떤 사람들이 보고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나.
A. 모녀 혹은 조부모와 손녀가 같이 보고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모두 연결돼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엄마 세대와 소통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젊은 친구들은 춘희를 중점적으로 봐줬으면 좋겠고, 엄마 세대는 우리를 봐주길 바란다. 서로 몰랐던 걸 알아가면서 결국엔 응원해주면 좋겠다.
Q. 안내서에 꼭 실리길 바라는 내용이 있다면 무엇인가.
A. 최근에 어떤 남자 배우가 인터뷰하는 걸 봤는데 <신세계>를 30번은 본 것 같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남자의 이야기’라는 말을 했다. 남자라면 모두 공감하는 이야기, 남성의 이야기로 불리는 것들이 있잖나. 그렇다면 반대로 ‘여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다. 성차별적 에피소드나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여성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소금과 호수>도 여자 이야기고 <육상의 전설>도 여자 이야기다. 여성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나 분위기, 여성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상황 등과 같이 명확하게 보이진 않지만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여성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육상의 전설>이 ‘필름X젠더’에 선정된 것도 보편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그런 엄마나 이모가 하나쯤 있지 않을까. 여자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강박이나 ‘네가 딸이니까…’라는 말로 시작되는 차별 같은 것들도 여자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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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미래의 여성 그리고 영화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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