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윤희와 새봄의 일기, 쥰의 편지

<윤희에게>

윤혜은 / 2020-01-23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새봄의 일기

2020년 12월 10일 목요일

신난다. 인문대에서 우리 학과의 기말고사가 제일 빨리 끝났다. 종강을 하자마자 엄마랑 부산엘 갔다. 내일 예정된 종강 파티에 빠진다고 학생회 애들이 좀 삐쳤지만 괜찮다. 엄마가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쓰게 된 휴가인데 당연히 내가 맞춰야지. 아니, 휴가라는 걸 처음 써본다고 했었나.

새봄, 엄마 휴가 써도 된대. 엄마는 퇴근 후 현관문을 밀고 들어오기가 무섭게 말했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고 바깥의 찬 공기 때문인지 볼은 약간 상기돼 있었다. 평소의 엄마에게선 보기 드문,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표정인데 그 순간 손에 카메라가 없어서 아쉬웠다.

엄마랑 떠나는 두 번째 여행. 어쩌다 보니 또 겨울이다. 딱히 계절을 타는 타입은 아니지만, 이맘때마다 여행을 하게 되려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만히 창밖만 바라보던 엄마가 거짓말처럼 꼭 비슷한 생각을 말했다.

 “자꾸만 이렇게 떠나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나는 어느 날과 같이 뭐 어때, 우리 집 그 정도는 괜찮잖아? 라고 철없이 말하지 못했다. 엄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했거니와, 문득 지금 엄마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꿈에 집중할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꿈의 끄트머리를 잡은 데에 성공한 엄마는 어쩌면 지금이 가장 불안하겠지….

나는 좀 미안한 기분이 들어 엄마의 손을 잡고 괜히 어깨에 기댔다. 엄마의 손은 건조했지만 따뜻했다. 그냥 한 번 기대본 건데 기다렸다는 듯 잠이 쏟아졌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엄마의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줘야지.


2020년 12월 13일 일요일

부산에 다녀와서 쓰는 일기. 내려갈 때 기차 안에서는 아이폰 메모장에 꽤 길게 썼는데, 여행 중에는 구경하느라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올라올 땐 내리 자느라…)

무엇도 그 순간을 오롯이 담을 수는 없다. 사진도 늘 조금씩은 아쉬웠다. 집에 캠코더가 있었다면 영상에 더 취미를 붙였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앨범을 펼치면 숨겨진 이야기가 보이는 듯했다. 이 사진과 저 사진 사이가 뭐랄까, 행간 같았다. 어린 나는 책을 읽듯 앨범을 읽었다.

작년에 엄마를 졸라 일본에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앨범이 보여주는 엔딩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 이야기가 얼마큼 더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밤, 몰래 엄마와 쥰 아줌마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전부를 알 수는 없겠구나. 평소의 나라면 사진을 찍고도 남았을 그 장면을 나도 모르게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그날의 영향이 크다. 사진이 담아내는 순간을 좀 더 확장하고 싶었다. 그때 기념품 숍에서 산 노트도 이제 몇 장 안 남았다. 이럴 걸 대비해 부산에서도 노트를 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서점에서였다. 핸드 바인딩한 작은 노트가 며칠 후면 내 새 일기장이 된다. 이번 일기장은 금방 써버릴 것 같아 두 개를 샀다. 혹시 내년 겨울에도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면, 그런데 그럴 수가 없으면, 일기장을 새로 사야겠다. 엄마에게도 여행을 대신 할 수 있는 뭔가가 생기면 좋을 텐데……. 엄마를 좀 더 알아봐야겠다. (부산 일기인데 부산 이야긴 하나도 없네. 내일 써야지.)


2021년 7월

<엄마 관찰 일기>

1. 엄마는 내가 “엄마, 난 엄마 참 안 닮았어 그치?”하면 쳐다도 안 보고선 “응 안 닮았어.” 한다. 요즈음의 발견은 아니고 엄마는 내가 자기를 닮았다는 말을 별로 안 좋아한다. 실제로 그런 말을 듣는 경우도 드물었지만.
  1-1. 그래도 내심 서운해지려고 하면 엄마는 “너처럼 예쁜 애가 날 왜 닮아. 네가 얼마나 예쁜데.”라고 한다.
  1-2.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내가 엄마를 닮지 않아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싫다. 우리가 서로를 닮든 닮지 않았든 엄마도 예쁘고, 나도 예쁘다.
  1-3. 지금 엄마의 삶이 충분히 예쁘고 나도 그런 것처럼.

2. 이건 진짜 요즘 이야긴데, 엄마는 종종 확인하듯 내게 묻는다. 내가 경수와 계속 잘 만나는지 궁금한가 보다. 그렇다고 하면 묘하게 안심하는 엄마가 나는 좀 싫어서 괜히 짓궂게 대답하고 싶어진다. “근데 너무 오래 만나는 것 같아. 재미없을 때도 있어.” 한 번은 일부러 이렇게 말했더니 그냥 물끄러미 나를 보고는 그러니? 하고 말았다. 뭐야, 진짜 재미없게.
  2-1. 솔직히 말하면 경수는 아직도 좋은데 경수 말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여자인 친구들이 더 편하다.

3. 엄마가 담배를 끊겠다고 선언해서 나도 끊어야 할 위기에 처했다.
  3-1.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안 돼! 경수가 예전에 엄마 담배피는 사진 보고선 얼마나 멋있다고 했는데! 걔는 그거 아직 실제로 보지도 못했는데! 라고 대꾸했다가 등짝 한 대 제대로 맞았다. 개 아팠음ㅠㅠ


윤희의 일기

2020년 5월 8일 금요일

퇴근을 하고 돌아오니 화장대 위에 웬 종이봉투가 올려져 있었다. 새봄이 어버이날이랍시고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봉투 안에는 말리 꽃이 기둥을 감싸고 있는 은은한 향초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편지, 정확히는 빈 편지지가 함께 있었다.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보니 종이가 빳빳하지 않고 약간 찰랑거리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살짝 투명한 듯도 하여 뭐 이런 편지지가 다 있나 웃음이 났다. 색깔도, 특별한 장식도 없이 옛날 노트처럼 정갈하게 까만 줄만 살뜰하게 그어져 있는 편지지였다. 세트로 보이는 편지봉투 위에는 딸이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

엄마, 이 편지지 세트 이름이 ‘연애’래! 편지가게에 붙여진 소개가 너무 예뻐서 엄마한테도 알려주고 싶었어.
 ‘부끄러운 감정도 스스럼없이 내비치는 연애의 모습과 닮은 편지지 세트. 투명한 종이인 트레싱지로 만들어져 봉투에 넣어도 그 내용이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단단한 흑연을 가진 연필로 쓰는 것을 추천합니다.’¹
알았지? 이제 여기에 이름을 쓰고 싶은 사람을 좀 찾아봐!
_새봄이, 윤희에게.

하여간, 얘는 명랑한 건지 맹랑한 건지. 그러면서도 일기장에 포스트잇을 옮겨두었다. 편지지는 구겨지지 않게 일기장 맨 뒤에다 끼워두었고. 생각보다 빨리 편지를 쓰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2020년 12월 10일 목요일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KTX 구간에는 바다가 전연 없었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딸이 부산에 가자고 했을 때, 휴가를 받아낼 자신이 없으면서도 흔쾌히 그러고자 했던 건 오타루행 열차에서와 같은 창밖 풍경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바다는 부산이지! 꼭 가본 것처럼 말하는 딸이 귀엽기도 했고.

설령 바다를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고 해도, 기차여행의 운치를 느끼기에 KTX는 너무 빨랐다. 부산까지 두 시간 반 남짓이면 도착하는 건 좀 멋이 없지 않나. 새봄이는 내년에 3학년이 된다. 모든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지나간다. 그게 위로가 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 나를 둘러싼 세상이 조금 느리게 흘러가도 예전처럼 겁이 나지는 않는다.

새봄 아빠와 결혼 전에나 가보고 부산은 참 오랜만이었다. 딸에게는 나도 부산이 처음이라고 했다. 뭔가를 마지막으로 만난 지, 마지막으로 한 지 20년도 넘은 일이 되어버렸다면 오늘 내가 만난 부산, 그건 처음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쥰의 편지

윤희에게.

생일 선물로 시집을 한 권 보냈어.
저번에 말했지. 네 오랜 기억 속 좋아하는 내 모습 중 하나가 시집을 읽는 나였다고. 당장 네 앞에서 시집을 읽어줄 수 없으니, (지금 읽는다고 그 시절과 같을까마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보내는 걸로 대신할게.

실은, 고바야시 잇사²의 하이쿠³ 선집이 일찍이 한국에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거든. 우리 병원에 자주 들르는 한국 유학생에게 도움을 청해 그 책을 주문했단다. 마침 네 생일 즈음이라 무얼 선물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네게도 아주 뜻밖의 선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내가 수업시간에 쪽지에다 잇사의 작품을 자주 적어 건넸으니까. 참…… 수업시간이라니, 지금에 와서 쓰기엔 너무 우스운 단어다. 네가 처음으로 답장을 보낸 편지를 인용하자면, 정말이지 모든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옛날 일이 되어버렸구나.

그럼에도 다시금 네게 잇사를 떠올리게 하는 지금은 얼마나 현실인지. 매일같이 돌아오는 오늘이란 건 참 무섭도록 선명하지, 생생하지.

그러니까, 곧 한국의 인터넷 서점에서 너희 집으로 배송이 갈 거야. 너나 새봄이 주문한 내역이 없더라도 당황하지 마. 우선은 이 편지가 책보다 먼저 도착하길 바라는 수밖에.

한국에도 지금쯤 벚꽃이 많이 피었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잇사의 하이쿠를 미리 옮기면서 이만 마칠게.

‘此やうな末世を桜だらけ哉’.
(그럴 가치도 없는 이 세상 도처에 벚꽃이 피었네.)

생일 축하해, 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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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희동에 위치한 편지가게 [글월]에서 실제로 판매하고 있는 제품, Letter Set│Love(연애)

2. 일본 에도 시대 활약했던 시인. 개구리 시인, 파리 시인, 아동 시인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천진스러운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3.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 5·7·5의 17음(音)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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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프리랜서 인터뷰어이자 14년차 일기인간.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어떤책, 20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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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그들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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