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사라 코너, 대니, 그레이스의 일기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정다희 / 2020-01-03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사라 코너의 일기

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젠장, 오랜만에 존의 꿈을 꿨다. 그날 이후 처음이다. Rev-9을 끝장내고 나서였지. 거의 곤죽이 된 몸을 대니에게 기대어 수력발전소를 벗어났다. 대니는 울지도 않았다. 독한 것. 물론 나도 더하면 더했지. 우리는 빠져나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꿈에서 T-800이 또 존을 죽였다. 나는 그 등에 총알을 갈긴다. 그는 사라졌다. 힘없이 쓰러진 존은 내 손에서 죽어갔다. 존의 얼굴이 흐릿했다. 눈물 때문인가? 손으로 눈을 비벼도 잘 보이지 않았다. 존이 말을 걸었다. 잘 들리지 않았다. 귀를 그에게 갖다 댔다.

 “사라, 사라.”

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구야? 다시 보니 품속에 대니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꿈이었다. 옆에 대니가 와 있었다. 살아있는 대니가 내 옆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었다. 하, 얼굴이 축축했다. 젠장, 노망이 들려나.

 “사라, 괜찮아요?”
 “가끔 악몽을 꿔.”

나는 대니의 손을 쳐내고 일어났다. 어깨가 아팠다. 젠장, 젠장, 젠장.

 “열이 나는 것 같은데.”
 “내버려 둬. 네가 나를 돌보려면 10년은 멀었지.”

나는 가방을 뒤져 해열제를 찾았다. 이 몸뚱아리가 최대한 버텨줘야 하는데.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대니에게 내 모든 것을 주고 가야만 한다.


대니의 일기

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사라가 하는 말은 대부분… 옳다. 나도 사라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사라는 나더러 보모 역할은 그만하라고 했지만, 이번에 떠나게 되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제 누군가를 잃는 건 진절머리가 난다. 사라가 오랜만에 쉬고 있는 것 같아 몰래 나왔다. 그레이스 가족이 자주 가는 놀이터다. 그레이스는 오늘도 동생의 손을 잡고 같이 놀고 있다.

말을 걸 수는 없겠지. 나는 뒤돌아 다시 차를 타러 갔다. 그때 옆에 주차된 차로 누가 그레이스를 데려가는 게 보였다. 부모는 아니었는데, 4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조금 이상해서 놀이터를 보니 부모는 그레이스의 동생을 달래느라 쩔쩔매고 있다. 그 남자는 그레이스에게 뭐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그레이스, 쉿, 이건 비밀이란다.”
 “뭔데요?”
 “선생님이 그레이스를 생각해서 특별히 말해주려는 거야. 일단 차에 타렴.”

아는 사람인지 그레이스는 순순히 차에 올라탔다. 나는 후드를 쓰고 차에 접근했다. 그 남자는 그레이스의 등에 있는 지퍼를 만지작거렸다. 그레이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조수석 구석에 붙어 있었다.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똑똑. 차창을 두드리자 남자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창문을 내렸다.

 “무슨 일입니까?”

퍽,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코를 갈겼다. 코피가 흘렀고, 당신 뭐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 같아선 머리를 깨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는 차 안으로 손을 넣어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그레이스를 내리게 했다. 남자는 황급히 차에 시동을 걸어 자리를 떠났다. 못난 새끼.

 “그레이스, 누가 널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너를 해치게 하지 마.”
 “언니는 누구예요?”
 “나중에 알려줄게. 다시 돌아올게.”

나는 그레이스를 마지막으로 꼭 안았다. 가족이 있는 곳으로 그레이스를 살짝 밀자, 그레이스는 내 옷자락을 잡았다.

 “언니도요.”

나는 뒤를 돌아서 갔다. 오늘 이렇게 대화까지 한 걸 사라에게 들키면 엄청나게 혼날 게 뻔했다. 절대 비밀로 해야겠다.

돌아오니 사라가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이름을 불러 깨우자 비명을 질렀다. 사라가 요즘 무리하는 것 같다. 걱정이다.


그레이스의 일기

2019년 10월 31일

오늘 놀이터에서 놀았다. 그러다가 프랭크 선생님이 왔다. 잠깐 얘기하자고 해서 갔는데 차에서 내 등을 계속 만졌다. 이상했다. 나가고 싶었다. 그때 어떤 언니가 와서 나를 꺼내줬다. 언니가 패니까 프랭크 선생님이 코피랑 눈물을 흘렸다. 속이 시원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언니가 돌아오면, 나도 언젠가 언니를 구해줄게요.


사라 코너의 일기

2019년 11월 1일 금요일

하루라도 잠잠한 날이 없다. 차라리 그게 나은지도 모른다. 그래도 대니가 그따위로 행동하는 걸 보면 화가 솟구친다. 저항군을 통솔하는 리더 감이라면, 최소한 경각심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사라, 이쪽은 민이에요.”

대니는 어디서 온 지도 알 수 없는 동양 여자를 데려왔다. 이마에 피가 칠갑이었고, 비쩍 말라서 어디 써먹을 수도 없게 생겼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여기는 병원이 아니야. 당장 꺼져.”

나는 그 인간을 밀쳐버리고 모텔 문을 닫았다.

 “사라, 무슨 짓이에요? 우릴 도와줄 사람이라고요!”
 “너야말로 무슨 짓이야? 그냥 이 앞에다가 ‘사라와 대니의 게스트하우스’라고 써 붙이지 그래?”

대니는 문을 벌컥 열고 다시 그것을 데려왔다. 대니는 나와 그것 사이에 서서 나를 노려보았다. 사라, 제발 잠깐 시간을 줘요. 나는 팔짱을 끼고 섰다.

 “이름은 민, 컴퓨터 전문가예요. 몸수색도 다 했고, 위험하지 않아요.”
 “그래?”

참 설득력 있군. 그러고 보니 등에 커다란 백팩을 지고 있었다. 지금 면상으로는 어디에 쓰러져 객사한다고 해도 믿겠는데. 나는 나이프를 들고 민의 목에 들이댔다. 목에서 침이 넘어가는 게 보였다.

 “기계인지 아닌지 알려면 한번 그어봐야겠지.”
 “그만해요.”

대니가 다시 말리려는데, 그 여자가 불쑥 주머니에서 뭔가 꺼냈다.

 “사라, 과자봉지에 폰을 보관하면 나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찾아올 거예요. 대신 이걸 써요.”
 “…?”
 “위치 교란 신호를 탑재한 폰이에요. 지금 위치는… 뭄바이로 되어 있어요. 추적하려고 하면, 가장 번잡한 곳으로 자동 이동되죠. 사실상 추적할 방법이 없다고 보면 돼요. 하더라도, 그 사이에 도망칠 시간은 충분할 테고.”

나는 폰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사라, 당신이라면 이런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거예요. 민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가소롭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당신이 30년 전부터 무슨 일을 해왔는지 알아요. 많은 사람은 정보를 모르는 게 아니라, 어떻게 찾는지를 모르죠. 어디든 당신에 대한 기록이 있어요. 정신병원 수감자, 테러범, 최근에는 입국관리소 테러리스트로도 지정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존의 죽음 이후 혼자 행동하던 당신이, 변했더군요.”
 “…”
 “나도 당신의 팀에 합류시켜 줘요.”

발목에 끼워두었던 권총을 꺼내 민의 머리에 댔다. 민은 양손을 들었다.

 “이건 같잖은 팀원 놀이도 아니고, 나는 네가 나에 대해 뭘 상상했든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죽어.”
 “여기서 빠져나가는 CCTV 없는 길을 알고 있어요.”
 “……”

방아쇠를 당길까 잠시 고민했다. 이용가치는 있다. 만약 스파이라면? 그때는 대니가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 민은 피를 많이 흘렸는지 조는 것처럼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저것도 연기가 아닐까? 갈등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막으려는 대니의 단호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대니. 네가 데려온 유기견, 밥이랑 똥은 네가 챙겨. 조금이라도 허튼짓하면 머리에 총알을 박아버릴 테니 그렇게 알아.”
 “알았어요.”

대니는 민을 부축해 바닥에 눕혔다. 나는 인상을 쓰면서 총을 잠가 집어넣었다. 아직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지켜보고 처리하든 해야겠다. 대니는 아무 사람이나 잘 주워오는 경향이 있다. 그레이스도, 망할 칼도 없는 지금 지원이 필요하긴 하니까…. 좀 튼튼한 놈이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건 대니의 안전을 위해서다. 어깨가 욱신거리자 망할 그레이스 생각이 났다. 결국 이딴 식으로 자기 기억을 남기고 가다니, 너무하군.


대니의 일기

2019년 11월 1일

미행이 붙은 것 같다. 감자 칩과 물을 사서 숙소로 돌아가는데 뒤에 어떤 사람이 계속 따라왔다. 혹시 터미네이터라면 바로 쏴야 한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로 계속 걸었다. 공격은 없었다. 골목으로 들어가니 뒤이어 들어왔다.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뒤에서 제압했다. 사라가 매일 연습시키는 무술을 실제로 써먹은 건 처음이다. 뿌듯해하기도 전에 아래에서 발버둥이 느껴졌다. 머리를 잡아 바닥에 몇 번 내리치자 축 늘어졌다. 아… 죽은 건 아니겠지?

 “저… 저기?”
 “켁, 콜록, 콜록.”

다행히 죽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마 살갗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양손을 자기 머리 뒤로 향하더니 그 사람은 항복, 항복이라고 외쳤다.

 “왜 따라오는 거지?”
 “다니엘라, 당신을 알아요.” 

나는 몸을 더 바짝 붙여 뒤에서 목을 잡았다.

 “무슨 속셈이야?”
 “저는 중앙정보국 직원이었어요.”
 “…”
 “‘전’ 직원이요.”
 “그걸 어떻게 믿지?”

그 사람은 한 손을 휘저어 자기 주머니를 가리켰다. 주머니에는 작은 태블릿 PC가 있었다.

 “그… 패스워드가 kujrp.”
 “무슨 뜻이지?”
 “그냥… 아무 뜻 없어요.”

열어보니 바로 신문 기사가 떴다. 전 중앙정보국 직원 도주 중. 작게 사진도 나와 있었다. 검고 긴 곱슬머리에 검은 눈동자. 같은 사람 같았다. 지금 머리가 매우 짧은 건 빼고.

 “거기 좆같아요. 남들 감시하고, 사라 코너도 이미 몇 년째 제가 맡아왔어요. 그거 알아요? 사라가 예언한 종말, 저도 믿었다는 거. 뭔가 개입하면서 그 종말은 오지 않았지만요. 제가 봐 온 정보에 따르면, 설득력 있는 예측이었어요.”
 “나는 너를 못 믿겠는데.”
 “다니엘라, 디에고는 일급 기밀 사항으로 완전히 소각되었어요. 흔적도 없이.”

디에고… 내 동생.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는 통제되고 있어요. 온갖 것들이 사라지고 위장되고 있다는 거, 알죠? 누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 그러는 걸까요?”

나는 팔을 풀었다. ‘전’ 중앙정보국 직원은 목을 감싸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몰골이 말이 아니군. 죽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들의 행적은 거의 방송되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
 “내가 당신들을 투명 인간으로 만들어줄게요.”
 “네가 얻는 게 뭐야?”
 “나도 누군가를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요. 나는 늘 감추고, 없애왔거든요.”
 “왜 하필 우리야?”
 “…글쎄요.”

나와 가장 비슷할 것 같아서, 라고 말해 두죠. 그는 비쩍 마른 몸에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동양인인데다 여자라니, 정부 요직을 맡았어도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을 테지만.

 “나나 사라를 위험하게 만들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
 “…네.”
 “사라에게는 중앙정보국 얘기는 하지 마. 당분간은. 그리고 이거 좀 먹어.”

감자 칩을 한 봉지 던졌다. 그 사람은 겨우 받았다. 얼굴에 흐르는 피 때문인지 퍽 불쌍해 보였다.

 “이름이 뭐야?”
 “민희요.”
 “민… 이?”
 “아니요…. 그냥 민이라고 하세요.”

리전과 싸움을 대비하려면 어쨌든 사람이 더 필요했다. 민은 바스락바스락 과자를 먹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결국 세상을 망친 것이 우리라면, 우리가 구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여기에서 먼저 리전을 찾아낼 작정이다. 그레이스는 리전의 전조는 전혀 없었다고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작은 단서라도 찾아 박살 내겠다. 다시는, 아무도 잃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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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수상한 소설 클럽 운영인. 매달 3편 이상 재미있는 소설을 써서 보내주자는 목표로 ‘비밀독자단’을 만들어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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