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가는 길
<밀어드려요>, <미아>, <자유로>, <좋은 날> 그리고 <홍이> 황슬기 회원
WDN / 2025-10-17
여성감독네트워크 WDN에서 지난 4월 19일 케이스 스터디 <여성감독 작업노트>를 진행했습니다. 감독의 발표 이후 대담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생생한 제작 스토리와 실질적인 꿀팁을 나눴답니다. 이번 행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함께 만나보시죠 :) |
<5th 여성감독 작업노트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영화만들기 A to Z”> - 일시: 2025.09.13 (토) 오후 1시 - 장소: 서울여성플라자 - 발표: 황슬기 회원 - 사회: 장희은 감독 |
현장 사진 ©WDN
Part 1. 광화문 미디액트에서 영화를 향한 첫걸음
지금은 홍대 산울림 소극장 근처에 있지만, 당시에는 광화문에 위치한 미디액트에서 영화를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 20살에 그곳에서 처음으로 독립 극영화 제작 수업을 들었다. 사실 중학생 때부터 영화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고향인 창원에는 영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때는 창원에 극장도 많이 없었기에, 영화를 보러 부산 시네마테크까지 가곤 했다. 그렇게 시네필의 꿈을 키우며 언젠가 서울에 가서 영화를 꼭 배우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대학 진학으로 서울로 오고서, 공교롭게도 서울 시네마테크에 있는 팜플렛을 통해 미디액트의 6개월 과정 영화수업을 알게 되었다. 그때 영화학교는 다 떨어진 상황이라, 바로 미디액트에 등록을 했다. 그 당시 4년제 대학을 다니는 중이었는데 그곳에서의 본 학업은 모두 등한시하고, 미디액트에 출퇴근하다시피 살았다. 미디액트에서 6개월 영화제작 과정이 끝나고 나서도, 조교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업보조자료를 만들거나 참관하는 업무들을 주로 했다. 미디액트에서 진행하던 다큐멘터리 액티비스트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며, 처음 카메라도 들어보는 등의 경험을 했다. 그렇게 동료들을 많이 만나게 됐고, 미디액트와 긴밀한 연결감이 생겼던 것 같다. 그러면서 ‘영화란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영화 보는 게 좋아서 영화감독이 될 거야’ 했던 그것과는 달리, 다 같이 만들어야 영화 하나가 완성되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 박소현 감독님, 부지영 감독님, 윤가은 감독님도 처음 뵙게 되었다. 그때 만났던 동료들과 지금까지도 함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영화를 열심히 잘 만들어서 뭔가 성취하고 인정을 받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그냥 우당탕 영화를 만드는 게 너무 재밌었다. 그날의 쾌감 어린 기억들이 원동력이 되어, 지금까지 계속 영화를 하게끔 해준다.
미디액트에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와 함께 활동하는 작업이 있었다. 나는 박옥선 할머니와 한 팀이 되어, 할머니의 일생을 담는 작업을 했었다. 면대면으로 인물을 만나고 기록하며 다큐멘터리의 과정을 처음 배웠다. 이후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사를 볼 때마다, 그 중요한 순간에 내가 그들의 삶을 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역사의 어떤 부분을 잊지 않는 지점이 되는 것 같다. 그때 담당 선생님이셨던 박찬옥 감독님께서 12명 수강생들의 모든 편집본들을 밤새어가며 모니터링 해주시던 모습이 귀감이 되었다. 창작자의 작업물에 대한 감상자의 어떤 응답이라는 것을 많이 배웠고, 그때의 배움으로 지금도 어떤 작품을 보면 정성 어린 피드백을 하려고 많이 애쓴다.
독립극 영화 제작을 수료하고 나서, 계속 광화문 미디액트 주변을 얼쩡거렸다. 당시 미디액트에서 단편 제작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시나리오 공모를 받아 촬영장비를 대여해 주었다. 그 공모에 선정되며, <신기루> 라는 단편을 찍게 되었다. 극영화 제작수업 과정을 수료하고서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인데, 동료들이 모두 도와준 지점에서 다시금 동료애를 확인했었다.
기존에 다니던 대학을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그만두면서 집안이 발칵 뒤집어진 비화도 있다. ‘나는 어차피 졸업하고서도 이 전공을 살리지 않고, 영화를 할 건데… 투자하는 시간과 돈이 아깝다’라는 마음이 강했기에 그런 선택을 강행했다. 그 이후에는 미디액트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그곳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고 또 영화를 좋아하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음에 즐거웠다. 친구들과 인형 탈을 쓰고 홍대를 돌아다니는 영상을 찍고 DVD를 만들어 지인들한테 나눠주기도 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패기와 즐거움으로 가득 찬 6년이었다. 이 시기의 경험은 창작의 뿌리로 내려,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다.
Part 2. 영화학교를 진학하며 새로이 경험한 것들
2010년부터는 독립영화 지원사업이 삭감되며, 영진위 후원을 받던 미디액트도 어려워졌다. 그렇게 광화문에 위치하던 미디액트가 상암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다. 광화문 미디액트라는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동료들이 흩어지게 되었다. ‘영화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 동료들이 있어야만 영화를 만들 수 있고 또 그 힘으로 다음이 이어질 수 있는데,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고민 끝에 영화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학교 안에서 만나는 동료들은 또 새로웠다. 다양한 지향점을 가진 동료들 사이에서 워크숍 스텝도 많이 하며 열심히 지냈다. 그러다 보니 흩어진 미디액트의 동료들도 다시 만나곤 했다.
학교에서 다시 만난 윤가은 감독님의 단편영화 <콩나물>에 조연출로 참여하게 되며, 그 인연으로 곧 개봉을 앞둔 <세계의 주인> 외의 모든 작품들을 함께했다. 이어, <우리들>을 통해 장편영화 조감독 업무를 처음 맡게 되었는데, 준비해야 하는 장편의 스케일에 정말 많이 놀랐다. 좌충우돌 여러 실수가 있었음에도 즐거웠고, 그 기회로 나의 일하는 방식도 알아 갔다. 사실은 다른 작품에 참여할 때마다, 주변에서 “너의 작품을 해야지, 왜 남의 작품을 도와주니?”라는 염려 섞인 핀잔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윤가은 감독님의 첫 장편은 내게 있어서도 손에 쥐면 바스러질까 겁날 정도로 소중하고 귀한 마음이 들었기에,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야겠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첫 장편 일을 통해서, 그 커다란 규모에 걸맞은 마음가짐을 가지는 법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우리들> 메이킹
그 이후 <자유로>라는 단편을 작업할 때, 감사하게도 <우리들>에서 만난 스텝들이 다 도와주셨다. 다른 작업을 하며 만났던 분들이 다 나의 작품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고, 커다란 동료애를 다시금 느꼈다. 사실 <자유로> 배우 캐스팅 또한 미디액트에서 알게 된 남순아 감독님의 도움을 받았다. 결국 인연들이 계속 이어지며 영화를 만들 수 있음에 큰 도움과 응원을 받았던 것 같다. 그렇게 <자유로>를 무사히 잘 찍어내고, 졸업을 앞둔 시점에 윤가은 감독님으로부터 다음 장편으로 <우리집>을 준비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너의 혜안이 필요하니, 가장 가까이에서 의견을 나눠줄 스크립터로서 영화에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라는 감사한 연락에, 다른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장편영화의 스크립터로 일하며 지난번 조감독으로서 얻었던 것과는 또 다른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또 <우리집>은 전작 <우리들>과는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이 좀 달랐기에 더 새롭게 배우는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물론 많은 위기와 실수도 있었기에 현장에서 눈물도 꽤나 흘렸지만, 끝나고 나니 말 그대로 ‘울며 불며 그래도 해냈다!’라는 성취감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집> 촬영을 잘 마무리 짓고, 졸업도 간신히 마쳤다.
Part 3. 시행착오를 겪으며… <홍이>로 다다르는 길
<홍이> 메이킹
그간 내내 주변에서는 개인 작업에 대한 염려와 재촉이 있었고, 나는 기존에 써놨던 장편 트리트먼트를 디벨롭시켜 첫 장편 이야기를 완성했다. 그때는 에어로빅을 하는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막상 졸업 후에는 학생 신분이 아니었기에,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일이 필요했다. 각종 아르바이트와 촬영 스태프 일을 병행하며 7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 미디액트에서 6년을, 학교에서 6~7년을 보내고 또 졸업 이후에 6~7년을 생계를 꾸리는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웹드라마 회사에서 조감독 업무와 학교 수업을 병행하고, 퇴근해서는 개인작업을 위한 레퍼런스 영화를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참여하는 작업마다 내 작품이라 생각하고 열과 성의를 다했는데 그러다 보니 개인 작품 개발에 소홀해졌다. 그 균형을 찾기가 몹시 어려웠다. 해서, 촬영 업무를 줄이고 편의점이나 음식점 등의 알바를 늘리며 개인 작업과 생계유지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첫 장편이다 보니 욕심이 많았고, 시나리오의 완성도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다 보니 여러 허점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뜯어고치는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렇게 오늘날의 <홍이>의 시나리오가 2023년 8월에 완성되었다. 사실 당시에는 <홍이>가 <식초의 온도>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편집과정을 거치며 <홍이>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 아무튼 ‘그동안 갈고닦으며 배운 모든 것들을 총동원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제작에 임했는데, 사실 연출자로서의 제작은 또 다른 이야기였기에 큰 소용은 없었다. <홍이>를 연출하면서 혼자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음과 동료들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처음 그 연출자로서의 고단함을 겪을 때는 ‘이 작품이 나의 유작이다…!’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함께 해주는 동료들의 의지와 용기를 더불어 겪으면서, 나의 실언 어린 오만함을 반성했다. 이 감사한 분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계속해서 애정을 갖고 다음으로 이어가야겠다는 각오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2년 전 이맘때 크랭크인해 다사다난한 희로애락을 겪은 <홍이>가 드디어 9월 24일에 개봉한다. 첫 장편 개봉을 앞둔 소감이란 참 복잡하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는 얼떨떨함과 긴장감도 있지만, 이 자리에 있기까지 함께해 준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마음이 정말 크다.
황슬기 감독 X 장희은 감독 대담 및 질의응답
현장 사진 ©WDN
장희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가는 길’이라는 표제가 참 좋았다. 발표를 들으며, 영화를 대하는 원천이 목적 없는 열정과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기에 20여 년간 계속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영화를 준비하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 꾸준함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를테면 생계유지에 대한 걱정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어려움이 있었다면, 어떻게 버티면서 나아갔는지?
황슬기
영화를 보는 것이 일단 너무 좋았다. 스태프 일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면, 물론 여러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면 영화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다. 극장에 가서 불이 꺼지고 스크린을 마주한 순간 매력적인 영화에 매료되었다. 그러면 그 힘들었던 기억을 단순하게 다 잊어버리고, 다시 할 수 있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장희은
미디액트에 6년가량 계셨고, 그때 만난 동료들과 꾸준히 작업을 해오셨다.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던 이유가 따로 있었는지? 잘 맞는 사람들을 규정 짓는 기준이 혹시 있었는지 궁금하다.
황슬기
사람들을 보면, 각기 가지고 있는 무언가들이 다 좋다. 사실 미디액트에서는 내가 거의 막내였기에, 좀 더 귀여움을 받았어서 덕분에 연명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웃음) 물론 내 안에도 사람들에 대한 호불호는 있다. 영화 현장을 가본 사람들이면 알겠지만, 촬영을 하다 보면 어떤 사람에 대한 모르고 있던 지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게 좋은 부분일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 데서 이제 단절이 쉽게 찾아오곤 하는데… 나는 서로 상처를 주거나 하는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다행히 소통을 하면서 잘 풀어왔던 것 같다. 여러 불화들이 있음에도, 소통을 통해 봉합의 과정을 겪어온 사람들과는 계속 인연이 이어지는 것 같다.
장희은
<홍이>의 첫 시작은 에에로빅을 하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로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딸 홍이의 모녀에 대한 이야기로 변화했는지가 궁금하다. 그 과정과 이유를 듣고 싶다.
황슬기
처음에는 중년 여성들이 에어로빅을 하며 희로애락을 겪고 성장하는 서사였다. 그러다 지금의 <홍이>의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가 된 데에는 개인사가 담겨있다. 당시 글을 쓸 때, 어머니가 조금 편찮으셨다. 그런데 가족들 중 어머니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시나리오도 고쳐야 하고, 어머니도 돌봐야 하는 삶 속에서 약간의 괴리감을 느꼈다. 기존의 시나리오는 모든 역경과 고난을 해맑은 자세로 극복하고 성장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내 삶은 그렇게 쉽지 못한 과정 속에 그 이야기를 어떻게 써나갈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있었다. 또 생업을 이어나감과 동시에 부양자로서 누군가를 돌보는 삶이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사회에서는 잘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 이런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하는 고민이 그때 가장 주요했다. 그때 “지금 너의 가장 큰 고민을 들여다보는, 가장 잘 얘기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써보는 것은 어떻겠냐. 그게 꼭 해피엔딩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하는 주변의 얘기에 큰 용기를 받아서 지금의 <홍이>를 완성하게 되었다.
장희은
<홍이>에 가장 담으려고 했던 진정성은 어떤 것인지?
황슬기
막연한 희망, 이를테면 ‘고난과 역경이 있지만 그래도 무엇이든 다 잘 될 거야’라는 판타지적인 시선을 피하려는 지점이 있었다. 그게 조금 비정하고 잔인하고 아프게 들릴지라도, 피하지 않고 직면하려는 부분을 잘 담아내려고 했다. 그 속에 진정성이 잘 담겼으면 좋겠다.
장희은
<홍이>를 제작할 당시에 ‘이 작품이 유작이다’라고 생각하셨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 느끼셨는지 궁금하다. 또 어떻게 해서 그런 마음을 벗어나 다시 영화를 이어나가려는 용기를 얻었는지?
황슬기
다른 분의 입을 통해 유작이라는 표현을 들으니, 이 얼마나 오만한 표현이었는지 새삼 느끼게된다. (웃음) 시나리오 퇴고하는 동안, 삐걱거리면서 꾸역꾸역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쓴 시나리오인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답답함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아마 그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방어기제로 ‘유작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그런데 촬영을 하면서 그 생각을 잊었다. 너무 바빠서 유작이니 뭐니 하는 그런 연민에 빠질 틈이 없었다. (웃음) 그러고 나서 후반에 편집실에서 촬영본을 보는데,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한 모든 순간들이 다 기억나는 것이다. ‘내가 연출을 참 잘했다’ 하는 마음이 들기보다는, 저 한 컷을 만들기 위한 기억들이 다 스쳐가는 것이다. 배우들과 얼마나 많은 얘기를 했는지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군분투하며 뛰어다니던 스텝들의 모습이 다 보이는 거다. 그래서 내가 이 작품을 끝으로 하는 것은, 저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느꼈다. ‘여기서 받은 힘을 자양분 삼아 다음 작품도 그들과 함께하는 일이 그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웃음) 그러니 그 발언은 철회다.
<홍이> 메이킹
장희은
그러면 시나리오에 대대적인 변화를 주면서도, 계속해서 가져가려는 지점이 있었는지? 또 뭔가 구심점 삼아 가져온 부분이 있었는지?
황슬기
첫 번째로는 일하는 여자들. 특히나 몸을 써서 일하는 여자들이다. 이전에는 주인공의 직업이 정수기 검침원이었다.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그런 직업을 이어나가려고 했다. 두 번째로는 모녀 관계와 엄마의 친구 관계이다. 세 번째로는 에어로빅. (웃음) 에어로빅은 나한테 애정이 어린 부분이라 놓치고 싶지 않아, 조금이나마 넣으려고 했다.
장희은
에어로빅의 매력이 뭐길래 이렇게 빠진 것인지?
황슬기
에어로빅은 정말 재밌는 생활 스포츠이다. 단독으로도 하지만, 보통은 페어나 단체로 하는 스포츠이니 구성원 간에 합을 맞춰야 한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항상 웃고 있으며, 일관성 있는 움직임을 해야 하는 지점이 참 매력적이다. 아마추어 에어로빅 대회 영상을 찾아보면, 틀리는 분들이 많다. 왼쪽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어떤 분은 실수로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그런다. 그 균형이 틀리더라도 그들은 항상 웃고 있다. 근데 그런 부분이 영화 작업하고도 굉장히 많이 닮아있다고 느낀다. 틀리더라도 웃으면서 완주해야 하는 협동 예술이라는 지점이 말이다. 그런 부분에서 에어로빅에 아주 깊게 빠져들었다. 여러분들도 한번 유튜브에 쳐보셔라. (웃음) 큰 활력이 느껴진다. 그 활력을 닮고 싶다.
장희은
그러면 이전의 에어로빅을 하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나, 지금의 이야기나 모두 중년 여성이 주축이 되는 이야기들이다. 계속해서 그런 주인공들을 중점 삼아 이야기를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황슬기
단편부터 쭉 중년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써왔다. 그 시작이 어디일까 생각해보면, 엄마가 떠오른다. 엄마에 대한 궁금증과 이해 욕구가 항상 있었다. 사실 그보다 더 강한 것은 엄마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으로 단편으로 시작을 했던 건데… 지금도 그 단편들이 너무 소중하지만, 그때는 좀 더 그들의 삶을 판타지처럼 다루고 있지 않나 하는 반성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 작업들은 ‘막연히 잘 살았으면 하는 희망에서 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엄마가 잘 지낼 수도, 또 잘 지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편을 준비하며, 그 자체로 엄마의 삶을 평가내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엄마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현실을 반영하면서 더욱 확장될 수 있었다.
장희은
여성 캐릭터를 다룰 때,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더 있는지? 나 또한 엄마에 대한 작업을 하면서, 전형성을 피해야 하는 과정이 어렵게 느껴졌다. 혹시 감독님도 느꼈는지 궁금하다.
황슬기
공감한다. 나도 대상화하지 않으려고 엄청 애쓰는 것 같다. 내 안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캐릭터에 반영되는 것을 지양하고자 많이 애썼다. 한번은 길을 걷다 중년 여성분들이 계모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아 귀엽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곧바로 그 생각을 반성했다. 어떤 세세한 삶의 과정들을 다 깎아내리고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일반화한 건 아닌지 하는 마음에서다. 그렇기에, 이 사람에게 보이는 밝은 면을 비롯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면을 모두 감싸는 다채로운 인물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더욱 가려진 부분들을 마주할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장희은
그럼 이번 <홍이>의 모녀 관계에서 어떤 다채로움은 만들어냈는지 궁금하다. 이 모녀의 관계성에 키워드를 뽑아보자면 어떤 것이 있을지?
황슬기
‘영원히 화해하지 않는, 화해할 수 없는 모녀 관계’이다. 서로를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각자 자기 안의 어떤 불화로 인해서 가까워지지 못하는 그런 관계 말이다.
장희은
소개글을 보면, ‘이상한 그리고 애틋한 여자들’이라는 키워드도 있던데, 왜 그런 키워드를 뽑았는지 궁금하다.
황슬기
저마다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항상 삶이라는 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장애물을 맞닥뜨리고 넘어서다 보면 성장 속에서 스스로도 모르는 흉이 지기도 한다. 자기 안의 상함을 모두 봉합하고 감추기보다, 그 모든 것을 끌어안는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고 싶었다.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더라도 다음을 나아가는 그 한 걸음의 용기가 무척 귀중하다. 그런데 그런 선택을 할 때, 사람들이 조금 이상하다. 남들이 포용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반대로 남들이 보기엔 괜찮은데 스스로는 납득이 어려운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런 복잡다단한 부분이 참 이상하면서도 애틋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러한 여성 캐릭터들을 그려냈다.
장희은
그럼 <홍이>에서 어머니를 치매 환자로 설정한 이유가 있는지?
황슬기
영화에서 엄마 ‘최서희’의 캐릭터는 몹시 도도하고도 강인한 성격을 지녔다. 그러니 그런 성격과 충돌할 법한, 그런 성격을 무력화할 법한 무서운 병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알츠하이머는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무력하게 하여 기억까지 잃게 한다는 지점에서 모녀 관계의 중요한 메시지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장희은
제목이 <식초의 온도>에서 <홍이>로 바뀐 과정도 모녀 관계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황슬기
영화에 식초를 만드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 과정이 모녀 관계의 속성과도 닮아있다고 생각해서 시나리오 초고부터 편집단계까지 <식초의 온도>였다. 그런데 막상 편집과정에서 보니, 식초보다는 인물들이 더 잘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좀 더 영화와 걸맞는 제목을 찾기 위해 70개의 새 제목을 리스트업했다. 그러다 1차 가편을 보던 윤가은 감독님이 “홍이 어때?”라고 의견을 주었다. 그리하여 고민 끝에 <홍이>가 완성되었다.
<홍이> 메이킹
장희은
주인공 이름을 제목으로 하다 보니, 관객들이 주인공의 감정을 더 쫓아갈 것 같아 좋은 제목인 것 같다. 그렇다면 관객들이 어떤 방향으로 영화를 감상하고, 또 어떤 감정을 기억해줬으면 하는지 궁금하다.
황슬기
영화가 어떤 인물이나 관계에 대해 100퍼센트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방식으로 구성되어있다. 또 기존의 30-40대 여성의 캐릭터들과는 다른 맥락을 담고 있기에, ‘관객들은 어쩌면 낯설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런 낯선 인물이 때로는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어쩌면 나와도 닮은 지점이 있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내 가까운 주변 사람에게도 숨겨진 모습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와 내 주변의 홍이에 관심을 가져볼까’ 하는 마음까지 이르면 참 좋겠다.
장희은
그럼 앞으로 예정된 차기작이 있는지 궁금하다.
황슬기
역시나 이해받기 어려운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홍이>에서 적극적으로 밀어보지 못했던 지점들을 다음 이야기에서는 더 해보고 싶다. 최현숙 작가님이 기록해내는 변두리의 여성들의 생애처럼, 건강하지 않고 잘 지내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삶을 꾸려나가는 여성 서사를 통해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
플로어 질문
‘중년 여성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라는 구심점은 어떻게 찾았는지? 자연스러운 관심인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과정이 있는지?
황슬기
‘엄마를 이해하고 싶고, 엄마가 궁금하다’라는 출발점으로, 엄마와 엄마 주변 친구분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제각기 다른 그들의 삶들을 알게 되었다. 곁에서 관찰하다 보면, 그들의 눈부신 통찰력과 지혜로움으로 성숙함을 느낄 때도 있는 한편 때로는 유치한 모습들도 발견하게 된다. 그런 관찰이 자연히 상상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일터에서 같이 일하는 분이 연근을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고서, 집에 와서 그 작은 소재를 확장시켜 이야기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구축해 나갔다.
플로어 질문
<홍이>를 제작하며 어떤 어려움들이 있었는지, 가장 큰 고비가 무엇이었는지?
황슬기
당연히 실수와 갈등은 많았다. 시나리오나 콘티를 준비하면서도 의견 충돌의 과정에서 그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화로는 영화 캐릭터들의 전사를 작성하여, 배우들과 스탭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내 딴에는 시나리오가 친절하지 못하니, 좀 더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 글을 공유했던 것이다. 그런데 스탭들의 반응이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감독님 이거 좀 폭력적일 수도 있어요.” 그러는 거다. 그 발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들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이해하는 입장이 다 다를지언정 모두 시나리오를 애정하는 마음으로 함께 해주는 분들이다. 그런데 전사를 설명함으로써 ‘시나리오를 받아들이는 단 하나의 입장을 강요한 것일 수도 있겠다’라고 깨달았다. 그 일을 계기로 스텝들을 더 신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오늘의 이야기들이 여러분들 마음에 닿았으면 좋겠다. 감사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영화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해나가겠다. 때로는 여러분의 동료로서, 때로는 여러분의 관객으로서 함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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