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알아두면 위안이 될지도 모르는 엉망진창 사적다큐 제작기

<잠자리 구하기> 홍다예 회원

WDN / 2025-10-17


여성감독네트워크 WDN에서 지난 4월 19일 케이스 스터디 <여성감독 작업노트>를 진행했습니다. 감독의 발표 이후 대담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생생한 제작 스토리와 실질적인 꿀팁을 나눴답니다. 이번 행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함께 만나보시죠 :)
<5th 여성감독 작업노트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영화만들기 A to Z”>
- 일시: 2025.9.13.(토) 오후 1시
- 장소: 서울여성플라자
- 발표: 홍다예 회원
- 사회: 권우정 감독

현장 사진 ©WDN

“8년동안 만든 사적다큐”

고등학교 때부터 다큐를 만들었다. 운 좋게 지역 미디어 센터에서 다큐 수업을 했기에, 그게 시발점이 돼서 장편 다큐를 만들게 됐는데 사실 체계적으로 영화, 특히 다큐를 만든 적도 없고 아직 전문 감독이라고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직업으로서의 다큐멘터리 감독보다는 그냥 라이프 스타일로써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촬영본들을 프리 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 프로덕션의 세 가지 단계의 순서대로 찍어본 적이 없다. 오늘은 프리 할까 하면 기획안 다듬는 거고, 촬영 좀 해볼까 하면 촬영을 하는 식으로 7년 동안 계속 저글링 하듯이 했다. 나중에 한 6년쯤 되었을 때 스텝을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너무 많은 일을 저질러 버렸기 때문에 스텝을 못 구했고, 결국 끝까지 혼자 하게 됐다. 그래서 사실 8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EBS 다큐를 좋아하면서도 항상 아쉬움이 많았다. 청소년과 어린이에 관한, 학교에 관한 다큐들이 어른들의 시선으로 청소년들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뭔가 대상화하듯이 보는 시선이 한편으로 좀 불편했다. 입시 교육의 문제점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고3 때 청소년의 시선으로 입시를 바라보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 동안 찍은 시기가 발단이었다.

그러다 고3 말에 대학에 다 떨어졌다. 재수를 하게 되었으니 다큐도 연장이 된 셈이다. 2년 동안 촬영을 했고, 이제 4년간 이어진 위기 단계가 찾아왔다. 대학에 입학했으니 다큐멘터리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이미 대학도 와버렸고 이제 입시에 대한 고민이 나에게 더 이상 유효하지가 않아졌으니. 그런데 아직도 고3 때 촬영본을 끄집어 보면 너무 억울하고 할 말이 많다고 느꼈다. 내가 대학에 온 상태에서 입시에 관해 걸 만들어 봤자 EBS에서 어른들이 했던 다큐멘터리와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기도 했다.

입시 외의 개인적인 문제들로 고민이 옮겨졌고, 작업과 삶의 방향을 잃고 약 4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위기의 시기를 지나고, 이제 절정이 1년 6개월 정도 갔다. 어느 순간에 방황이 끝나는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냥 내가 겪어왔던 일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보면 되지 않을까라는 식으로 감이 잡히기 시작했고, 그렇게 장편 가편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가편집 버전만 한 열몇 개가 된다. 끊임없이 공장처럼 가편집을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돌리고, 피드백을 받고, 좋은 것을 골라 듣고, 제작 지원에 내고 다 떨어지고, 지도 교수님 면담하고, 난리를 치다가 1년 6개월이 지났다.

결말은 어떻게 되었냐면, 우선 엄청나게 많은 편집본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추가 촬영을 했고, 더는 뭘 건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던 시기에 마지막으로 피드백을 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좋다고 해주길래 그냥 마무리를 해버렸다. 이후에 자잘한 수정을 거쳐 최종본을 완성했고, 이런 식으로 8년이 걸렸다. 

“우울증과 함께 다큐 만들기”

위기의 4년 동안 가장 큰 문제는 우울증이었다. 우울증에 걸린 상태에서 사적 다큐를 만들다 보니 작업이 잘 안되었고, 그러다 보니 더 우울하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겪었던 우울증은 세 종류로 나뉘었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작업과 관련 있는 우울이었다.
작업에 표현되는 것은 내가 인생에서 가장 크게 고민을 하고 있는 지점이다. 나의 경우에는 입시였던 것. 입시가 끝났는데도 계속 불안이 지속되었고, 그게 작업과 관련 있는 우울이었다.

두 번째는 작업과 관련 없는 우울이었다.
입시 고민도 있었지만, 살아가며 고민하는 지점들이 많이 바뀌었다. 예를 들면 인간관계라던가. 근데 이런 고민들이 작업에 넣기에는 너무 뜬구름 없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은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우울이었다.
이런저런 상태 때문에 결국 작업이 계속 안 되었던 것이다. 작업과 관련 있는 우울만 골라서 느낄 수는 없으니.

이 세 가지 우울이 합쳐진 채로 4년 동안 계속 기획안을 쓰고 편집을 하고 촬영을 했다. 그런데 이게 합쳐지니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들은 이야기는 ‘이 다큐로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라는 것이었다. 작업 주제를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세 개가 섞여 있는 동안 주제가 불명확해지고 다큐가 어그러지는 그런 느낌. 그래서 일단은 3가지 우울을 분리시키려고 했다.

예를 들어서 작업과 관련 있는 우울은 입시에 관련한 주제였고, 작업과 관련 없는 우울이 인간관계에 대한 주제였고, 작업을 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우울이 그냥 나 자신에 대한 어떤 우울함 뭔가 실망감이었다면은 이 세 개의 주제를 나눠서 각각 영상을 편집을 한번 해봤다. 입시와 관련된 거 인간관계와 관련된 거 그리고 나에 관련된 거 이런 식으로 나눴을 때 보니까, 이게 내가 뭘 얘기하고 싶었고 여기서 어떤 것들이 연결이 되고 뭐가 연결이 안 되는지가 조금씩 형체가 조금 드러나더라.

우울증과 함께 다큐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됐던 건, 이 세 가지를 잘 구분해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잠자리 구하기> 스틸컷 ©WDN

“제작지원 사후세계 탐방”

이 위기의 순간에 우울증뿐만 아니라 제작 지원의 세계를 탐방하게 됐다. 

제작 지원에 다 떨어졌을 때 처음에는 당연히 실망하고, ‘내 다큐가 가치가 없나’ ‘내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나. 그냥 일기장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세 단계를 거쳤다.

일단 ‘내 다큐는 공개 시기를 너무 앞서갔다’고 마인드 컨트롤 단계를 거쳤다. ‘아직 기획안 단계라서 공개될 게 아니었다’라는 합리화를 하고, 막상 완성돼서 보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고로 내가 이겼다.’라고 합리화를 하고, 아무도 뽑아주지 않아도 내가 열심히 썼으니 상관없다는 식으로 합리화하기도 했다.

그다음에 현실 증명을 하려고 했다. 동료들이나 교수님께 가편집본을 보여주거나 구두로 설명하며 피드백을 받았다. 피드백을 부탁하면서 ‘네 거는 어떤 이야기인 것 같다.’ ‘뭐가 필요한 것 같다’ 이런 얘기를 선별해서 좋은 것만 들었고 그다음에 전환 전략을 짰다.

제작 지원도 잘 보면 종류가 여러 개가 있지 않나. 예를 들어 기획안에 특화된 것이 있고, 사전 제작이나 촬영 중에 있는 지원에 특화된 것도 있다. 내가 마지막에 받았던 건 두 개의 현물 지원이었는데, 편집본을 가지고 가서 멘토링을 받는 프로그램이었다.

 전환 전략을 어떻게 짜면 좋을까 생각을 해봤을 때, 우선은 1번 기획안 형이 있다. 글을 무언가 설명하는 데 능숙해서 가편집이 글대로 나오지 않으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분들 같은 경우는 기획안으로 사전 제작 지원을 빨리 받아서 그 돈으로 편집 감독을 구해서 같이 작업을 하는 게 더 빨리 끝내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다음으로는 기획안은 못 쓰는데 가편집으로 뭔가 보여줄 수 있다, ‘한 방의 펀치가 있다’는 유형. 러프 컷이나 트레일러, 가편본 정도 되는 길이의 영상으로 제작 지원이나 선투자를 받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네가 다 계획이 있구나’ 형이었다. 스스로의 노동비로 ‘찐’ 독립영화를 만드는 거다.

“셀프 카메라의 힘”

이런 제작 지원 과정을 거치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있다.‘다른 다큐와 비교했을 때 내 다큐의 가장 큰 어떤 차이점이 뭘까’라는 생각에서 셀프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도 사실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카메라로 자기 자신을 찍는 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그 친구들이랑 얘기를 해보면서 ‘셀프 카메라라는 게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의 경우에는 우울할 때마다 나 자신을 많이 찍었다. 그 당시에는 너무 우울하다 보니까 카메라로 나를 찍는 거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었다. 셀프 카메라로 자기 자신을 찍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솔직하다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자의식 과잉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비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솔직함과 자의식 과잉의 경계는 어디인가라고 했을 때, 그것도 좀 고민이 됐다. 반면 그냥 내가 나 자신 앞에서, 나중에 영상을 봤을 때 어떤 식으로 내가 나를 보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셀프 카메라를 찍을 당시에는 이런 고민을 크게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우울함을 견디게 하는 게 나의 카메라였기 때문에. 영화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몰랐고. 그래서 마치 답장을 받지 못하는 외계인에게 계속 수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미래의 나에게 과거의 내가 어땠는지를 꼭 기억할 수 있도록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서 좀 더 필사적으로 기록을 했다.

현재 나는 아무 영화를 못 만들지만 미래에 내가 어쩌면 좀 더 성장하고 성숙해졌을 때 이것들을 가지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게 결국에는 과거의 나, 그러니까 지금 찍고 있는 지금의 나를 구할 거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오히려 첫 번째 영화를 끝내고 두 번째 영화를 기획할 때 이런 자아 분열이 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솔직하게 찍고 있는 건가 아니면 너무 자의식 과잉인가’ 하며 보이지 않는 관객도 생각하게 되고,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 어떻게 보일지, 내가 편집할 때 이걸 감당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을 좀 계산적으로 고민을 하게 되며 결국에는 이제 나를 못 찍게 됐다.

내가 나를 기록하는 수단으로 이 카메라를 쓸 만큼 지금 절박하지가 않은데, 그러면 내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현재의 화두다.

현장 사진 ©WDN

질의응답

권우정
10대의 이야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20대의 고민으로까지 이어가며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8년 동안 작업을 끌고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었는지 궁금하다.

홍다예
그냥 좀 원래 성격이 좀 끈질긴 것 같다. 엎어버리려는 시도도 몇 번 했었지만, 계속 다른 걸로 도망치려고 해도 결국 다시 돌아왔던 것 같다. 원동력이라면 미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권우정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런 정체성 형성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할 수 없었던 내용들을 친구에게 편지를 쓰며 일종의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끝맺음도 인상 깊었다.

홍다예
솔직히 말하면 칭찬이 고팠던 것 같다. “괜찮은데? 볼 만해” 정도의 이야기도 큰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나 자신에게 확신이 없어서, 제삼자가 어떻게 볼지에 대한 확신을 너무 필요로 했다.

그러니까 굉장히 수동적인 동력으로 이 영화가 만들어진 셈이다. 영화에 들어가는 친구에게 쓰는 편지의 내레이션은 2022년 초에 완성했지만, 사실은 19년도인가 20년도에 썼던 내레이션이었다. 써놓고도 내가 진짜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만약 친구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이 말을 할 수 있을까’라고 했을 때 못한다고 생각을 했던 건데, 영화를 완성해 갈 즘에 이제는 진짜로 이 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다. 그래서 그걸 엔딩으로 마무리를 하고 싶었고 그렇게 마무리가 됐다. 확신이라기보다는 어떤 감정적인 부분의 해소가 마무리를 지어준 것 같다.

플로어 질문
만약에 제작 지원을 받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영화를 완성하려고 했는지?

홍다예
제작 지원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제작 시스템을 혼자 만들어내고 싶었다. 제작 지원을 받게 되면 ‘내 영화가 읽혔고 그게 받아들여졌다’라는 효능감도 물적 지원만큼이나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 효능감이라는 걸 어떤 기관이나 정부에서만 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동료 작업자들끼리 가끔 모여서 덕담 같은 걸 주고받는다던가. 그리고 경제적인 부분 같은 경우는, 의 경우에는 색보정과 사운드 믹싱도 안 한 상태로 개봉을 했다. 영자막, DCP 정도만 돈이 드니까 사비로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만약 내가 아무런 지원도 없이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일단 예산에 일차적으로 형태를 맞출 것 같다. 가진 돈으로 조금이라도 만드는 선택을 하게 될 것 같고, 현실적으로 내가 만들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만들자는 생각이 가장 컸다.

권우정
직업적 다큐멘터리 감독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이 다큐멘터리 감독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홍다예
사실 다큐를 선택해서 인생의 절반을 손해 봤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큐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전부를 손해 봤을 것이다.

<잠자리 구하기> 스틸컷 ©WDN

플로어 질문
미련으로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요즘은 어떤 것에 미련을 가졌는지가 궁금하다. 8년간 작업해 온 다큐를 완성했을 때, 공허함이 컸는지 후련함이 컸는지도 묻고 싶다.

홍다예
작업을 처음에 내보냈을 때는 처음 한 1년 정도는 후련했던 것 같다. 상영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하는 것이 재미있었고, 새 작업도 열심히 기획했다. 그런데 한 1년쯤 지나니 서서히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작업을 할 때는 시간이 안 지나간다고 느꼈다. 작업을 끝내니 비로소 내 삶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좀 후련했던 것 같다. 내가 이제 나이를 먹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 

플로어 질문
제가 알기로는 개봉 지원 못 받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동력으로 개봉까지 갔는지가 궁금하다. 또한 개봉을 했을 때 가장 많이 봤으면 하는 관객층이 있었는지, 그 관객층이 개봉 후에 일치했는지도.

홍다예
2023년도에 포스트 링크인가 그걸 통해서 배급사를 하나 만났다. 거기 배급사 대표님이랑 같이 하기로 했는데, 그때는 이미 영화제 지원은 거의 다 끝난 상태였다. 근데 그 배급사와 같이 하고 싶었던 이유는, 다른 배급사들과 달리 그 배급사 대표님만 공동체 상영에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셨다.

처음에는 개봉을 하고 싶지 않았고 공동체 상영만 하고 싶었다. 그래도 대표님이 개봉 지원은 넣어보자고 제안을 주셨는데, 그렇게 2년 연속 떨어졌다. 근데 대표님이 개봉을 자체 투자로 하자고 하셨다. 부담스러워서 안 하고 싶다고 했는데, 대표님이 “이대로 상영을 끝내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 아니냐”라고 해 주셔서 믿고 개봉을 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배급을 했다.

내가 만나기를 원했던 특정 관객층은, 내가 졸업한 학교의 후배들이었다. 당신들이 살고 있는 이 공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상상을 했었는데, 그건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학생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권우정
첫 번째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감독님에게 있어 관객이 어떤 존재로 자리 잡았는지 궁금하다.

홍다예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고 되게 기대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두렵다. 하지만 내가 막상 영화를 보려고 OTT 사이트에 들어가면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거의 찾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그냥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내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나도 어쨌든 관객에 포함이 되는구나’라고 생각을 좀 하게 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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