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WDN 여성감독 작업노트] 너도 만들 수 있어 애니메이션!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노경무 감독

퍼플레이 / 2024-11-28


여성감독네트워크 WDN에서 지난 7월 28일 케이스 스터디 <여성감독 작업노트>를 진행했습니다. 감독의 발표 이후 대담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생생한 제작 스토리와 실질적인 꿀팁을 나눴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퍼플레이의 협력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함께 만나보시죠 :)
<여성감독 작업노트: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영화만들기 A-Z>
-일시: 2024.7.28.(일) 오후 2~5시
-장소: 스페이스 합정
-발표: 노경무 감독


너도 만들 수 있어 애니메이션!

제목을 이렇게 정한 이유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 같이 애니메이션을 대학에서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만들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은 10번이나 시험관 아기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한 주인공 부부가 남성 임신을 연구하는 김삼신 박사를 만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블랙 코미디 애니메이션이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30분이고 컷 수는 290컷이다. 제작비는 1억 8500만 원이 들었고, 제작 기간은 총 1년 반이 걸렸다. 전체 스탭의 수는 약 20명 정도 된다. 적지 않은 제작비에 놀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30분 분량에 많다고 할 수는 없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20분 정도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 지원하는 금액이 2억 정도였다. 제작비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해 지원받은 금액이다. 

똥손감독
나는 똥손 감독이다. 내가 얼마나 똥손인지 보여줘야 이곳에 오신 분들도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 그림을 준비했다.

콘티 1 ©WDN

티 2 ©WDN

(관객 : 잘 그리셨는데요?) 감사합니다. 

시나리오를 다 쓰고 나서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이 작품 이전에 만든 7분 정도 되는 은유적인 애니메이션이 필모그래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다 쓰고 나서도 캐릭터 디자인이 없었다. 당시 프로듀서님이 콘티를 먼저 짜보라고 말씀하셔서 대충 그려본 콘티이다. 나는 그림 그리는 걸 무서워한다. 잘 못 그릴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배경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그 위에 캐릭터를 얹기도 했다. 이 정도 수준의 그림 실력이라도 원하는 바가 정확하다면, 좋은 스탭을 만날 수 있다면 애니메이션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
시나리오, 캐릭터/배경 디자인이 준비되면 콘티를 그린다. 각 신의 컬러 계획을 미리 볼 수 있는 컬러 스크립트도 준비한다.

컬러 스크립트 ©WDN

레이아웃 ©WDN

동시에 레이아웃 과정을 거친다. 콘티보다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그리는 그림이다. 비유하자면 콘티가 ‘벽돌로 집을 짓겠다’는 계획이라면, 레이아웃은 ‘유럽산 벽돌, 크기는 몇 곱하기 몇 cm, 총 1만 개를 이용하겠다’와 같은 세부 계획에 가깝다. 콘티를 구체화하는 작업이고, 이 작업을 마치면 이 그림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화, 동화 애니메이팅 과정으로 간다. 그와 동시에 배경 작화가 이루어지고, 원동화를 마친 후 채색한다. 각 파트의 결과물이 나오면 합성하고 이펙트를 넣어 영상을 완성한다. 성우 녹음은 애니매틱 단계에서 선녹음을 하거나, 최종 완성 후 후시녹음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 사운드와 음악을 더해 최종 결과물이 나온다.

콘티(스토리보드)를 그리고 나서 ‘애니메틱’을 만든다. 이 과정이 애니메이션 본 제작에 앞서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스토리보드 이미지 한 장 한 장을 영상으로 편집한 것을 말한다. 애니메이션 작업자들이 본격적인 작화를 하기 전에 각 컷이 꼭 필요한 것인지 알기 위해, 각 컷의 지속 시간을 포함해 동작, 걸음 수, 배경 파일의 사이즈 등을 정확하기 알기 위해 이 과정을 거친다. 영상 편집만 할 수 있어도 가능한 작업이다. 앞서 보여드린 달걀귀신 같은 콘티는 나 혼자 그렸고, 이후 조감독님과 힘을 합쳐 캐릭터 디자인을 얹은 정식 스토리보드를 그렸다. (분량으로만 따지면 조감독님이 70% 정도 그렸다.) 나는 이 그림을 가지고 영상으로 만들었다. 맘에 들지 않으면 표정, 동작 등을 고쳐서 다시 영상에 반영했다. 그림은 조감독님의 도움을 받았지만, 영상 편집은 온전히 감독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이다. 때문에 그림 전공이 아니어도 극영화를 베이스로 작업하는 영화 제작자들도 충분히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제작기간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의 제작 기간은 총 1년 8개월이다.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제작 과정 ©WDN

앞서 설명한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감독으로서 나의 역할은 작업자들의 결과물을 검토하고 OK나 리테이크 요청을 하는 것이다. 나의 요구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의사소통 기술만 있으면 애니메이션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전체 제작 과정 중에 메인 프로덕션은 효율적으로 진행됐다. 모두가 사무실로 출근해 작업했던 덕분이다. 그 이후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을 외주 업체와 계약을 맺어 작업하게 되면서 아무래도 학생 작품이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에 작업 기간이 늘어진 면이 있다. 또, 시나리오 쓰면서 캐릭터 디자이너를 미리 구했다면 2개월은 단축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완성 시점을 훨씬 앞당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초보 감독으로서 겪어야 했던 시행착오였다고 생각한다.

학교 입학이 확정되기 전에 시놉시스부터 트리트먼트를 개발하는 데 4개월이라는 시간을 썼다. 영화의 첫 시작은 딩크족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개발 과정에서 난임 부부로 바뀌었다. 딩크족에게 아기를 낳고 싶게 설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만드는 것보단 전환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 덕분에 지금 형태의 블랙 코미디 장르의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 

제작비
제작비 중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건 인건비였다, 원화, 동화, 채색, 미술 감독, 배경 아티스트, 조감독과 연출팀이 있었다. 더불어 프로듀서의 필요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독립 애니메이션은 프로듀서가 따로 없는 경우가 많다. 워낙 저예산인 경우가 많아서 감독이 다 알아서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프로듀서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연출에만 집중하면서 애니메이션을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경험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이 프로듀서가 제시한 제작 가이드라인을 따라가면서 할 수 있었고, 스탭들과 돈 얘기는 하지 않고 일에 관해서만 소통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하루 출근하는 프로듀서에게 월급을 주는 게 아깝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돌이켜보니 일종의 보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프로듀서와 협업하길 추천한다. 

너 내 동료가 돼라!
이 영화의 스탭을 구하는 데 두 가지 루트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 다른 하나는 인맥을 통한 베테랑 영입. <안 할 이유 없는 임신> 스탭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역할은 캐릭터 디자이너였다. 평소 관심 있게 지켜본 웹툰 작가에게 SNS를 통해 컨택했다. 배경 디자이너와 미술 감독 등 여러 파생되는 모든 프리프로덕션 파트는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누굴 팔로우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졌다. 혹시 싸이월드를 안다면, 옛날에 싸이월드 일촌 파도타기 하듯이 인스타그램 서칭을 통해 스탭을 구했다. 또 10년 경력의 프로듀서를, 학교 네트워크를 통해 베테랑 작업자를 섭외할 수 있었다.

스탭 구하기 ©WDN

애니메이션 한 편이 완성되는 데 나의 그림 20%만 있다면, 스탭들이 감독의 머릿 속에서 30%를 꺼내주고, 또 스탭들은 작업 과정에서 50%의 재능을 더해서 100%가 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여전히 꺼내어지지 않은 50%가 있는 셈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감독 혼자 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스탭이 제시하는 50%를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나와 잘 맞는 사람들과 협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평소에 SNS를 서칭할 때 나와 결이 같은 아티스트가 있는지 유심히 보는 편이다. 스탭을 구성하는 데 인맥 파트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이고 싶다. 소속되어 있는 곳이 있다면 그 인프라와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편이 좋다. 나는 미대 출신도 아니고, 애니 회사에서 일한 적도 없기 때문에 애니 제작 인프라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1억이 넘는 예산을 잘 쓰기 위해서는 본 제작에서 낭비가 없어야 했고, 그래서 베테랑이 와야 했다. 10년 경력에 감독 경험이 있는 프로듀서를 섭외하면서 그 분이 함께 일했던 20~30년 경력의 애니메이터를 섭외할 수 있었고, 학교 네트워킹을 활용해 장영규 음악감독님이나 김삼심 박사의 성우를 맡은 이용녀 배우님을 섭외할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은 비대면으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지만 <안 할 이유 없는 임신>의 스탭진은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을 프로듀서가 계획했다. 아마 내가 초보 감독이기 때문에 더더욱 출근이 필요하다고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작화 파트의 스탭들이 오면 손짓 발짓 애교 애원 애걸복걸 모든 것을 동원해서 소통했다. 금손 감독은 보통 직접 그려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스탭에게 원하는 것을 요청하지만, 나는 회의실에서 몸짓 발짓 등 모든 언어/비언어적 요소를 동원해서 요청했다. 공간이 협소해서 요일을 돌아가면서 출근했고, 작업 내용이 공유되어야 했기 때문에 구글 시트를 이용했다. 모든 컷을 리스트업 하고, 각 파트의 각 컷을 누가 담당하는지, 수정사항이 무엇인지, OK인지 리테이크인지, 시작일, 완료일, 진행 퍼센트 등 모든 요소를 구글 시트에 기록하고 체크했다. 

일단 저지르기
영화에는 남성 임신에 대해 멘토를 구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은 어떻게 보면 ‘일단 저지르는 식’으로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로토스코핑 ©WDN

당시 캐릭터 디자인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의 똥손으로는 콘티 그리기가 두려워 개그맨 사진이나 예능 방송의 출연자 중심으로 시나리오에 썼던 이미지들을 마치 배우 캐스팅하는 것처럼 사진을 콘티에 넣게 되었다. 근데 막상 사진을 넣고 보니 진짜 사람이 나오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프 콘티 단계에서부터 로토스코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로토스코핑이란, 촬영된 영상을 한 프레임씩 따라 그려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기법이다.) 성우 녹음을 할 때 멘토 역할 배우를 불러 영상 촬영도 하고 녹음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배우를 만나 디렉팅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런 작업 과정도 재밌었다. 배우의 제안으로 사투리로 바뀐 대사도 있다. 

로토스코핑 ©WDN

로토스코핑의 정석대로 일일이 따라 그리게 되면 비용이 700만원 정도 들어가지만, 이비신스(EBSynth)라는 AI 프로그램을 활용하게 됐다. 영상의 3프레임만 그려도 그것을 영상의 분량만큼 뻥튀기 해주는 프로그램이었고 무료였기 때문에 100만원 정도에 이 장면을 구현할 수 있었다. 고민할 시간에 저지르게 되면 의외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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