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이미화의 영화처방] 미래 내 모습이 선명히 그려지지 않아 불안한 당신에게

<백엔의 사랑>

이미화|에세이 작가 / 2020-12-03


누군가 나의 기분을 이해해주기를 바란 적 있나요? 나와 꼭 닮은 영화 속 주인공에게 공감했던 적 없나요? 영화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또 위로와 공감의 말을 건네고자 합니다. 위안이 필요한 순간, 이미화 작가의 ‘영화처방’을 찾아주세요.

오늘의 고민사연 : 평소엔 자존감이 낮은 편은 아닌데, 일할 때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문득 마음이 무너지곤 해요. 미래를 생각하면 걱정이 꼬리를 물고 늘어나서 잠에 들지 못하는 밤이 많아요. 특히 여성 사무직으로서 당장 내년, 3년 후, 5년 후에 이 업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지, 또 10년 후엔 과연 내가 어떤 밥벌이를 하며 살고 있을지...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가진 재능이 참 하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 마음을 내가 갉아먹게 되더라고요. 업계에서 성공한 여성에 대한 영화나, 아니면 마음에 위로가 되는 영화를 보면 좀 나아질까요?

〈백엔의 사랑〉 포스터

글을 쓰는 프리랜서이면서 공간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인 내게도 직장에 다니던 시절이 있습니다. 의뢰받은 키워드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경제적인 이윤이나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정보를 주는 일이었지요. 요즘이야 ‘빅데이터 전문가’ ‘빅데이터 분석가’라는 직업이 4차 산업을 주도하는 유망직종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직명도 없었을 뿐더러(있더라도 생소했고), 의뢰인의 대부분이 정치인이라서 SNS에 떠다니는 온갖 정치적인 공격과 혐오표현을 수집하고 분석하느라 데이터라면 넌덜머리가 나던 때였습니다. 

총선과 대선이 같은 해에 치러졌던 2012년은 전쟁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매일 수백명 분량의 데이터 분석 기사를 송고한 후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저도 사연자 님과 같은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이 일에 미래가 있을까. 3년 후, 5년 후에도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을까.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는 이 일에 내가 과연 대체되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10년 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백엔의 사랑〉 스틸컷

32살의 이치코는 모든 물건을 100엔에 판매하는 100엔 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합니다.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시급은 1,200엔. 전문대를 졸업한 뒤로 별다른 기술도 경력도 없이 몇 년간 부모에게 의지한 채 살아온 이치코가 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편의점뿐이거든요.

100엔샵은,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해대는 40대 동료와 뒷문으로 몰래 들어와 폐기 도시락을 잔뜩 가지고 도망가는 할머니, 인사도 무시하고 한심한 듯 내려다보는 손님들까지. “100엔, 100엔, 100엔 생활, 싸요, 싸요, 뭐든 싸요!” 흘러나오는 로고송처럼 여기서 일하는 자신이 마치 100엔짜리로 느껴지게 하는 곳입니다.

〈백엔의 사랑〉 스틸컷

스스로를 100엔짜리 여자라고 말하는 이치코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3년 후에도, 5년 후에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낼까요? 사회생활도 못하고 인간관계도 별로인 이치코라면 얼마못가 편의점마저 때려 칠지도 모릅니다. 독립한 지 1,2년 만에 다시 부모 집으로 들어갈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녀의 일상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치코가 선택한 건 미래를 위한 자격증이나 취업 준비가 아니라 복싱이었어요. 

“시합도 할 수 있나요?”
“32살이면 쉽지 않은데. 여자 선수 테스트는 32살까지거든.”
“아직 32살이거든요.”

출퇴근길에 복싱장을 구경하던 이치코는, 정확히 말하면 운동 중인 권투선수 유지를 훔쳐보던 것이었지만, 계기야 어쨌든 복싱을 시작하게 됩니다. 정말 시합이라도 나가려는 사람처럼 편의점에서도, 집에서도, 일하는 날에도, 쉬는 날에도 줄곧 복싱만 합니다. 

〈백엔의 사랑〉 스틸컷

“너 좀 변했구나.” 

운동을 시작한 후 이치코는 조금 달라집니다. 없던 자신감도 생기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가족들과의 관계도 회복이 되어 부모님이 운영하는 도시락 가게를 돕기도 하죠. 잠시 사귀다 자신을 차버리고 떠난 유지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합니다. 

“일요일에 시합에 나가. 보러 와.”
“너 말야. 복싱 왜 시작했냐?”
“서로 막 패고 또 어깨도 서로 두드려주고 그런 모습들. 왠지 그런 걸 하고 싶더라고.”

시합에 나간 이치코는 상대에게 실컷 두드려 맞고 경기에서 패배하지만 후련해 보입니다. 그동안 연습하던 왼손 훅을 (한번뿐이지만) 상대의 턱에 제대로 날렸고, 땀범벅이 된 서로에게 매달리듯 뒤엉켜 어깨도 툭툭 두드려주었거든요. 자신의 인생에서 이렇게 원 없이 열심인 적은 없었고, 그래서 얻은 결과이니 그것이 패배일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백엔의 사랑〉 스틸컷

이후에 이치코는 어떻게 될까요?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까요? 아무래도 이치코가 복싱선수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드라마라면 모를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죠. 그럼에도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을 위해 땀범벅이 된 채로 연습을 하거나 가끔 링 위에 선 이치코의 모습을요. 그리고 조금 안심하게 될 겁니다. 

모니터 앞에 앉아 미래를 상상하던 때가 8년 전이니, ‘10년 후의 나’가 2년 밖에 남지 않았네요.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걱정한 결과가 지금의 나인 걸 알았더라면, 빅데이터 분석가가 유망 직종이 될 줄 알았더라면 조금은 덜 불안해했을까요. 

〈백엔의 사랑〉 스틸컷

여전히 나는 10년 후의 내가 궁금하긴 하지만 그때처럼 불안해하진 않기로 했습니다. 다만 이치코의 복싱을 보며, 10년 뒤에도 지속할만한 취미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그 취미를 지속하고 있는 내 모습은 그려질 테고, 분명 오늘보다 더 나은 실력일 테니까요. 10년 후를 위해 오늘 무얼 준비해야 할지는 전혀 감이 안 잡히지만, 내일 있을 시합을 위해서라면 오늘 해야 할 일은 분명할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요가를 시작했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40분씩. 무리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걱정도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그 시간에만 집중하기로요. 3년 뒤, 5년 뒤, 10년 뒤에 내가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을지는 몰라도, 요가만큼은 오늘보다 확실히 나아질 나를 떠올리면서! (그럴 거라 믿으며 오늘도 뻣뻣한 몸을 한껏 늘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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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을 잇는 공간 <영화책방35mm> 운영. 영화 에세이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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