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여성감독 작업노트] 우당탕탕 첫 장편 만들기

<애국소녀> 남아름 감독

퍼플레이 / 2024-04-26


여성감독네트워크 WDN에서 지난 4월 6~7일 케이스 스터디 <여성감독 작업노트>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은 극영화,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여성 감독들이 장편영화 작업의 어려움과 문제해결 과정을 공유하는 자리였는데요. 감독의 발표 이후 대담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며 생생한 제작 스토리와 실질적인 꿀팁을 나눴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퍼플레이의 협력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글로 함께 만나보시죠 :)
<여성감독 작업노트: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영화만들기 A-Z>
-일시: 2024.4.7.(일) 오후 2~5시
-장소: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아트컬리지3
-발표: 남아름 감독
-사회: 박마리솔 감독


[발표]

남아름: 이전에 <핑크페미>와 <순간이동>이라는 단편을 작업했고, <애국소녀>는 첫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가족을 찍은 다큐멘터리로, 대학원 졸업 작품이다. 저희 부모님은 386 세대인데 두 분이서 같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 아빠는 행정고시를 봐서 공무원이 되는 게 진정한 민주화 정부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 공무원이 됐고, 엄마는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되었다. 이렇게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두 사람 사이에서 자란 저는 부모에게 민주주의를 선물 받았다고 굳게 믿으며 이들을 존경했는데 20살이 되기 전에 세월호 참사를 마주하게 됐다. 그 당시에 아빠가 관련 부처 공무원이어서 부모가 일군 민주주의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는 과정이 있었다. 이런 한국사에 가족사가 얽히게 되었고, 또 미투라는 시기에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2019년 3월에 기획을 시작했고, 이 작품을 하면서 피칭을 엄청 많이 했다. 배움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수능 공부하듯이 열심히 했는데 득과 실이 있었다. EIDF(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하는 글로벌 피칭 아카데미에 참가하게 됐다. 몇 달 동안 교육 프로그램을 하고 선발된 팀들은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 견학을 보내준다. 운 좋게 전주 시네마 펀드 피칭이 됐고, 2020년에는 DMZ 인더스트리 피칭이 되면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다. DMZ에서 언젠가는 꼭 프리미어로 틀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 작품을 꼭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남아름 감독이 ‘여성감독 작업노트’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WDN

2021년에 DMZ에서 틀 생각으로 그해 2월에 편집을 시작했는데 그동안 아무것도 안 찍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렇게 좌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21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래서 촬영을 재점검하고 그해에는 촬영을 거의 다시 했다. 2022년 상반기가 되니까 돈이 떨어졌다. 장편을 하기 위해서는 단편에 비해 돈이 거의 2~3배 드는 것도 모르고 했다가 후원 펀딩을 하고 22년 하반기에 촬영과 편집에 집중했다. 촬영이 끝났다고 생각한 게 2023년 4월이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아빠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 해소해야 될지 잘 몰랐는데 아빠가 매년 4월 안산에 간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것으로 이 작품이 마무리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2023년 5월에 DMZ에서 전화가 왔다. 언제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이미 3년을 기다려주신 터라 4월에 마지막 촬영을 하고 세 달 동안 열심히 편집해서 9월 DMZ에서 틀게 됐다. 

이 작품으로 제작 지원을 많이 받았다. 피칭도 하고 면접도 봤는데, 사적인 이야기가 공공기금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한정된 자원을 나누는 것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하는 건 맞지만, 사적 다큐나 젊은 여성 감독을 향한 시선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많다. 피칭을 해서 지원금을 받은 것은 좋았지만 그만큼 내상도 깊어서 피칭을 한 번 하고 나서는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못 했다.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게 나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져 힘들었다. 

그래서 제가 취한 방식은 개인의 이야기가 얼마나 정치적인지를 이야기하고 그것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었다. 처음에 제작지원서 쓸 때는 ‘나’ ‘엄마’ ‘아빠’라고 했는데 애 같다는 사람들도 있어서 인칭을 바꿨다. 제작지원에 붙고 나서 심사평을 보니까 가족의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다. 이게 얼마나 정치적인 이야기이고, 얼마나 거대한 서사를 다루는지를 증명할 수 있어야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아름 감독이 ‘여성감독 작업노트’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WDN

촬영을 마치고 편집에 들어가게 됐는데 단편 만들 때는 내가 원하는 걸 붙이면 됐지만, 90분의 서사를 끌고 간다는 건 정말 어렵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하는 일이란 걸 알게 됐다.  <닐스 안데르센의 영화 편집 수업>에 위로가 되는 글이 있었다. ‘보통 첫 번째 러프컷에서 위기가 온다’는 문장이었다. 대체로 감독들은 ‘내가 이걸 위해서 수년간 일해온 건가?’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모두가 종착하는 문제이니 너무 괴롭게만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편집에 임했다. 

편집일지를 만들고 투두리스트(To Do List)를 썼다. 신 만들어보기, 시퀀스 붙여보기 등 편집 포인트를 편집 전날이나 당일에 미리 계획했다. 나중에는 ‘feeling and thinking’이라고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내 감정이 중요한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어떤 감정의 변화가 있었고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정리하고, 이것을 내레이션으로 잘 녹여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감정이 이야기로서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어떻게 장면화할 수 있는지 고민하자. 감정 소모할 시간이 없다.’ 이런 것들을 계속 썼다. 처음에는 ‘이 작품을 왜 시작했을까. 진짜 포기하고 싶다. 내가 부모님에게 못 할 짓을 한 것 같다.’ 이렇게 썼다가 점점 나를 객관화하는 상황을 만들려고 노력하게 됐다.

미로 보드도 추천드리고 싶다. 손으로 쓰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디지털화하는 게 더 체계적이고 보기 편할 때가 있다. 추가 촬영, 편집 구성안 등을 보드에 보기 좋게 정리하거나 구글 독스를 바로 링크할 수도 있다. 

작품의 마스터 이미지가 뭐냐고 묻는다면, 저희 엄마 아빠가 열심히 산행을 하다가 서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두 분이 목표는 같지만 다른 길을 가자고 말한다. 이게 제 작품의 많은 걸 내포하고 있어서 이 장면을 중심으로 편집했다. 둘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갈림길에 섰을 때 아름이 느꼈던 딜레마나 고민을 관객들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몇몇 해외 영화제에 출품하려는데 출품료가 너무 비쌌다. ‘네가 형편이 어려운 저예산 영화 감독이면 우리가 할인 코드를 줄 테니까 메일을 보내라’고 안내해주는 영화제들이 있다. 한 해외 영화제는 출품료가 비싸서 포기했는데, 그 영화제가 나중에 다른 루트를 통해 제 영화의 스크리너를 받아 보고 초청해준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뭐가 됐든 열심히 메일도 보내고, 노크를 많이 해야 기회가 찾아올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몬트리올과 미국에 갔다 왔고, 대만영화제는 출품을 통해 선정돼서 5월에 가게 될 예정이다. 

제가 DMZ와 어떤 연관은 없지만 거기서 피칭도 하고 상영도 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전주나 부산처럼 큰 영화제도 있지만, 지역에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제나 자신의 작품을 잘 소개하고 홍보할 수 있는 곳도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다. 저도 피칭할 때 이런저런 어려움 때문에 많이 억눌렸었는데, 그러지 말고 어떤 영화제가 나와 어울릴지 고민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박마리솔 감독(왼쪽)과 남아름 감독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WDN

[대담 및 질의응답]

박마리솔(이하 박): 작품을 시작한 때가 2019년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학부 때 계획을 하신 건데 어떤 계기로 단편에서 장편이 됐는지 궁금하다. 

남아름(이하 남): 단편으로 제작지원을 낼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단순하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기에 30분은 너무 짧다. 더 길게 하고 싶다’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일이 점점 커지게 됐다. 

박: 그때는 한국 사회에 다양한 일들이 펼쳐지기 이전이었다. 그 당시에 어떤 지점에서 이게 영화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셨는지 궁금하다. 

남: 제목을 ‘애국소녀’라고 한 이유가 있는데 2019년 광장에 여러 태극기가 나왔었다. 그래서 두 개의 광장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그때 단일 집회도 크게 일어났었고 흔히 태극기부대라고 하는 집회도 있었다. 조국 장관이랑 관련된 것도 태극기를 들고 나와서 정치적 신념이 애국이라는 키워드로 이야기되기도 했다. ‘이 조국을 우리가 구해야 한다’는 구호들이 얘기되던 때였다. 20~30대 여성들은 ‘내 광장은 없다’는 말을 했는데 많이 공감했다. 세월호를 겪고, 누군가는 승리의 기억이라고 말하는 탄핵이라는 정치적 변화를 겪고, 미투를 겪었는데 그 뒤에 2019년의 광장을 보면서 우리가 쉴 수 있는 광장이나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있나 물어보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투를 겪으면서 탄핵 때처럼 제도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2차 가해나 역고소에 시달리는 상황들이 있었고, 그러면서 이 시대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라는 것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어린 여성’이 정치적 공간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정치적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데서 느끼는 좌절감이 20~30대 여성들이 느끼는 감정일 수 있겠구나 싶어서 나의 서사를 잘 구축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박: 가족을 찍는다는 게 접근은 쉽지만 제대로 촬영하는 건 참 어렵다. <핑크페미>에서도 어머니와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솔직하게 담아내셨는데, 가족과의 대화를 이끌어가는 비결이 있나? 

남: 제가 인터뷰하기 전에 아빠에게는 항상 장문의 편지를 썼다. 출근하시기 전에 문 앞에 붙여놨다. 내가 왜 이 얘기를 하고 싶고, 왜 이걸 아빠가 꼭 해줘야 하는지, 그런 내용들로 3장 정도 써서 붙여놓으면 마음이 좀 움직이셨다. 그렇게 아빠에겐 삼고초려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그런데 아빠를 제대로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는 딱 세 번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그래도 호의적인 편이었다. 엄마가 야행성이라 새벽에 잘 안 주무셔서 엄마랑 둘이 있을 때 솔직한 얘기가 많이 나왔던 것 같다. 

박: 그럼 아빠를 설득하는 기간이 얼마나 됐던 건가?

남: 아빠가 자리에 앉아서 인터뷰를 해주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아빠의 꿈이 기자였는데 그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계속 찍어놓은 것들이 있다. 그게 아빠의 마음을 움직이는 치트키가 된 것 같다. ‘나는 아빠가 남겨놓은 이 테이프를 완성하고 싶다. 이걸 그냥 창고에 보관하려고 놔둔 건 아니지 않냐. 내가 완성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했더니 그게 아빠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박마리솔 감독(왼쪽)과 남아름 감독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WDN

박: 그런 식으로 다층적으로 접근하면서 설득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이 한예종 전문사 졸업 작품이기도 한데 학교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작업하는 것의 장단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남: 장점은 따뜻한 온실이 있다는 거다. 촬영을 부탁했을 때 나와줄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 피드백을 받고 싶을 때 언제든지 봐주실 수 있는 선생님이 있다는 건 엄청 큰 장점이다. 또 마감이 있어야 모든 게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수업과 데드라인이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반면에 단점이라고 하면 피드백을 해줄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 너무 많은 어른들이 얽혀 있어서 힘들기도 했다. 이게 386 세대에 대한 이야기라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물론 재미있었고, 처음에는 저도 다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학교 친구들끼리 ‘귀를 닫는 게 아니라 많이 열어야 한다. 빨리 나가도록 크게 열어놔야 된다’는 말을 하곤 했다.

박: 매일 촬영 계획을 세우셨는지 궁금하다.

남: 초반에는 그걸 안 세워서 문제가 됐다. 그냥 주구장창 찍었다. 집에서 자고 있다가 엄마 아빠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 것 같으면 갑자기 일어나서 찍고, 등산 간다고 하면 따라가서 찍고. 근데 그렇게 찍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게 2020년~2021년이 되면서인 것 같다. 엄마는 집회나 행사 위주로 찍었고, 아빠는 팔로우 촬영을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꼭 찍어야겠다 싶어서 출근길을 찍겠다고 했는데 그걸 허락받는 것도 3개월이 걸렸다. 

질문자: 제작지원서를 어떤 스타일로 썼나? 본인만의 스타일이 있었는지?

남: 처음에는 많이 떨어지면서 배웠던 것 같다. 심사위원도 수많은 기획서를 보는데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겠나. 그래서 좀 웃기게 쓰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많이 썼다. 어떤 곳은 면접을 갔는데 심사위원분이 ‘이런 가족을 어떻게 찾으셨어요?’라고 물어보더라. 내가 이만큼이나 객관화를 잘했구나 싶기도 했다. 내 이야기를 타인의 이야기인 것처럼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나 싶었다. 그런데 저는 무엇보다도 진정성이 중요한 것 같다. 첫 작품이고 아직 경력도 많이 없다 보니까 진솔함이 통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마리솔 감독(왼쪽)과 남아름 감독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WDN

박: 사적 다큐나 여성 감독의 영화를 폄하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저도 그런 말을 많이 들으면서 제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할 수 있는 동력이 있나? 

남: 타격이 너무 컸는데 나중에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는 게 너무 분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게 에너지가 됐다. ‘내가 얼마나 잘 만들어내는지 두고 봐라’ 싶었다. 이 작품을 잘 못 만들거나 엎어지면 그 사람들한테 지는 것 같더라. 그리고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서로의 용기가 되길 바랐다. 그래서 점점 오기가 생겼던 것 같다. 

박: 이번 작품을 만들면서 참고했던 영화나 책이 있나?

남: 다큐멘터리 <버블 패밀리>를 많이 참고했다. 캐나다의 사라 폴리 감독이 만든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라는 작품이 있는데 제 작품이랑 결이 다를 수도 있지만 영감을 많이 받았다. 또 제가 피칭하고 힘든 게 많았다. 저는 제 작품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어떤 포션 때문에 상을 준 거라고 생각했다. 신입에게 상을 하나는 줘야 하는데, 여성 신진 감독에게 그 포션을 줬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감 없는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상을 받아도 내 무능력이 들통날 것 같고, 나는 이걸 받을 만한 역량이 안 되는데 너무 과도한 걸 줬다는 식으로 나를 억눌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시기에 제가 좋아하는 감독님이 책을 선물로 주셨는데 제목이 <여자는 왜 자신의 성공을 우연이라 말할까>이다. 여성들이 앓는 가면 증후군이 있는데, 자신의 성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 일반화하면 안 되지만 남성 감독들은 ‘이거 너무 중요한 얘기야’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데 여성 감독들은 좋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못하고 억눌려 있는 게 많다. 그래서 이 책을 보고 용기를 많이 얻었고 큰 도움이 됐다. 

박: 서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고민이었던 점은 무엇이었나?

남: 세월호를 얘기하지 않고서는 서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제 영웅이었던 부모에게 실망했던 순간도 세월호 때다. 저희 아빠가 이런 일을 했다는 걸 이야기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편지를 쓰는 것처럼 지원서를 작성해서 4‧16재단 공모에 냈다. 그게 당선됐고, 나중에는 DMZ영화제에서 상영하기 전에 유가족분들이 모니터링도 해주셨는데, 그분들께 큰 용기를 얻고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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