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었던

<일하는 여자들>

최민아 / 2020-07-23


<일하는 여자들>   ▶ GO 퍼플레이
김한별|2019|다큐멘터리|한국|21분

<일하는 여자들> 스틸컷

어제의 의미가 오늘의 모순이 되었다. 상황과 감정은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 파고들었지만, 돌아보면 어느 것도 별안간 일어난 일은 없었다. 그저 내가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들의 이면은 자신을 비롯한 누군가의 경험에 기대어 다가서게 된다. 나의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갔다. 거대한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도, 내가 딛고 있는 작디작은 공동체도, 나와 연결된 복잡다단한 관계망도, 어떤 이면을 마주하며 깨져버린 크고 작은 환상의 나라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그 면면은 우리를 분노케 하다가 무력감에 빠지게 하고, 때로는 모르는 척 눈 감고 싶게도 한다.

혼란한 세상의 이면을 목격하고 그 혼란함에 더 깊숙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무력감에 빠지거나 눈 감지 않고, 분노에서 의지로 스위치를 전환하여 변화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 누구나 그러하듯 처음부터 투사는 아니었다. 생의 한가운데 삶의 숱한 이면을 마주해 온 나와 당신과 다름없을 보통의 사람들. 모든 변화는 이로부터 시작된다. 영화 <일하는 여자들>(김한별, 2019)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기울기를 스스로 돌파해나가는 ‘일하는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일하는 여자들> 스틸컷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일하는 여자들’은 방송계 대표적 비정규 직군인 방송작가들이다. 여성 비율 약 95%에 달하는 이 직업은 시작의 역사에서부터 ‘여성이 하기 좋은 직업’으로 고착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하나의 방송을 만들어가는 기초부터 완성까지 크고 작은 무수한 일들이 방송작가의 손을 거쳐 가지만 이들의 이름은 중심이 되지 못하였다. 세계의 기울기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정말 이대로 두고 볼 수밖에 없는 걸까?

2017년 11월, 방송작가유니온(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이 출범했다. 방송작가는 프로그램을 통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내부의 문제는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방송계 2년 차이자 방송작가유니온 활동가인 박지혜 작가, 17년 차이자 방송작가유니온 초대 지부장인 이미지 작가. 영화의 중심이 되는 두 인물은 내가 이 일을 하고 싶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노조에 뛰어들었다. (영화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김한별 감독 또한 방송작가이자 방송작가유니온에서 활동하고 있는 당사자이다. 노조 활동과 다름없이 자신(들)의 언어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를 희망하며 내가 선 땅의 기울기를 직접 말하고자 카메라를 들었다.

<일하는 여자들> 스틸컷

여기 모여든 모두 누군가의 기쁨이 되는 방송이 비정규 노동자의 눈물로 만들어지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는 생각에 뜻을 모았다. 그렇게 부당한 현장에 맞서는 이들과 연대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나갔다. 노동자로서 자각하지 않았던 스스로가 노조 활동을 통해 노동자라는 자존감을 높이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인터뷰는 언뜻 무던해 보이지만 안팎의 현실을 그대로 비춘다. 연차와 관계없이 모두 한목소리로 말하듯,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사회에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지를 넘어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내재화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노동을 인정받지 못해 왔던 노동자, 이들이 한데 모여 서로를 확인하고 스스로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가슴 벅찬 경험이 카메라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너머에는 방송작가유니온 출범에서부터 2019년 국정감사에 이르기까지, ‘방송작가도 노동자다’라는 외침을 전파하기 위한 투쟁이 계속된다.

<일하는 여자들> 스틸컷

프리랜서라는 직업 특성이 이들의 노조 활동을 연대감으로 묶어주었다면, 이들을 잇는 또 다른 고리는 일하는 ‘여자들’이라는 자신이다. 여성이 절대다수를 이루는 직군인 만큼 영화에서 다루는 노동의 문제는 자연스레 ‘방송작가라는 노동자’ 뿐만 아닌 ‘일하는 여자들’로 치환된다. 노조를 출범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된 가운데 지부장이 없어 좌초될 뻔한 순간, 이미지 작가는 후배 세대가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부장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 또한 여느 여성 노동자들처럼 가사노동과 노조 활동의 양립에 대한 절박함과 무게감을 온몸으로 떠안아야 했다. 각자의 노동을 마치고 가정으로 돌아오는 동일한 가족 구성원이라 할지라도 동등한 위치를 가질 수 없었다. 남성은 남성으로 존재하지만 여성은 엄마로서 존재하며 또 다른 노동을 요구받고, 유능한 여성들은 그렇게 남편의 불만과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짓눌리지만 이 또한 당연하게 여겨질 뿐이다.

이미지 작가의 집에 방문한 후배 작가들은 ‘엄마’인 이미지 ‘지부장’을 보며, 여성의 가사노동과 방송작가의 노동이 닮아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여기까지 왔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방송국을 벗어나 서로 마주한 이들에게서는 노조의 연대감과 또 다른 정서적 유대가 전해진다.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무엇이든 당연히 해내야 하는 이들의 삶. 여성의 노동은 어떤 역할을 해냈으며 이는 어떤 역사가 되어 왔는지, 그리고 우리 자신은 어떻게 받아들여 왔는지에 대해 자문하게 되는 순간이다.

<일하는 여자들> 스틸컷

노동자와 여성이라는 연결고리를 지나 이 영화에 보다 특별한 숨결을 불어 넣는 것은 박지혜 작가와 이미지 작가로 대변되는 ‘일하는 여자들’을 향한 존경이다. 이미지 작가의 노조 활동은 노동자로서 나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다음 세대는 나보다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람에서 시작된다. 박지혜 작가는 전지전능하고 유능한 선배로만 여기던 이미지 작가와의 노조 활동을 통해 존경하는 선배이자 함께 변화를 만들어가는 동료로서 힘을 얻는다. 이들의 행간에는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진하게 배어나며 이는 곧 우리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발현된다.

여성 노동자의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에서 우리는 어떤 특별한 에너지를 목격해왔다. 대표적으로 호명되는 2007년 홈에버 여성 노동자들의 점거 농성을 기록한 <외박>(2009, 김미례)에서, 최근 발표된 2019년 톨게이트 요금 수납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록한 <보라보라>(2020, 김도준·김미영·김승화)에서, 투쟁에 나선 여성들은 사측만이 아닌 이 사회와 맞서 싸워야 했고 노동자이자 여성인 동지로서 서로 활기를 북돋우며 현장을 지켜나갔다. <일하는 여자들>에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이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다르다. ‘일하는 여자들’의 연대로 수렴되면서도 개별의 존재를 향한 좀 더 친밀한 존경과 지지는 이 영화를 통해 여성 노동자들의 ‘이면’을 만나게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또 다른 의지를 함께 목격하게 될 것이다.

박지혜 작가가 웃으며 던지는 ‘정의로운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해서 그 사람까지 정의로운 건 아닙니다’라는 말은 짐짓 꽤 아프다. 이 문장의 ‘프로그램’은 어떤 목적어로 바뀌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고 이상이기도 하다. 세상은 온전히 정의로워지지 않겠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의미와 모순 사이 끝없는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겠지만, 저마다의 삶에서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 높여나갈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모두가 투사일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 모두가 자신(自信)하기를 바란다. 누구라도 미력하나마 무력하지 않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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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다큐페스티발 사무국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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