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사라지는 기억을 기억해나가는 항해

<물의 도시>

최민아 / 2020-03-19


<물의 도시>   ▶ GO 퍼플레이
박소현|2018|다큐멘터리|한국|31분

<물의 도시> 스틸컷

어떤 시간을 지나며 삶의 길잡이를 만나곤 한다. 그것은 오랫동안 경험한 무언가일 수 있고 우연히 마주친 누군가일 수 있으며 찰나를 스쳐온 어딘가일 수 있다. 저마다의 경험을 통해 자리한 삶의 길잡이는 그로 하여금 또다시 어떤 시간을 견디어내는 나로 살게 한다.

“요즘 계속 길을 잃는다. 먼 옛날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줬던 별들은 더 이상 서울에서 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대신 도시의 빛만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영화 <물의 도시>(박소현, 2018)는 ‘길잡이’를 떠올리는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주목한 삶의 길잡이는 ‘노량진 수산시장’이라는 장소이자 역사이며 기억의 산물이다. 1927년 서울역 부근에 세워졌던 어시장이 1971년 노량진으로 옮기며 조성된 이곳의 상인들은 40여 년의 세월 동안 이 터전을 삶의 길잡이 삼아 지키고 살아내었다.

<물의 도시> 스틸컷

감독은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조개를 캐곤 했던 작은 섬 동네의 기억을 더듬는다. 할머니 손을 잡고 배에 올라타 갈매기를 구경하던 그 섬에도, 이제는 뱃길 대신 차가 다니는 큰 다리가 생기고 조개를 캐던 갯벌도 단단한 땅으로 메워졌다. 할머니는 배가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게 갈매기들이 길을 알려주는 것이라 했고, 감독은 그 갈매기들이 섬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고 읊조린다. 그렇게 노량진 수산시장 옆으로도 ‘신시장’이라는 커다란 배 한 척이 정박했고, 감독은 어린 날들의 기억을 길잡이 삼아 떠올리며 ‘구시장’이라는 누군가의 삶에 다가선다.

2004년 6월, 수산물 유통체계 선진화를 앞세워 ‘노량진 수산시장 현대화’라 이름 붙은 정책 사업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부와 수협을 주축으로 현대화 사업은 가속화되었고 2015년 10월 신축 건물이 완공됐다. 그러나 ‘구시장’이라 불리게 된 이들의 ‘신시장’ 입주 문제를 둘러싸고 상인들과 수협 간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됐다. 상인들은 시장이 자신들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현대화라는 미명 뒤에는 카지노를 중심으로 한 리조트 건설의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물의 도시> 스틸컷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투쟁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시장의 파괴를 그려나가지 않는다. 오랜 시간 이곳을 손수 살아낸 상인들의 일상을 더듬으며 이곳에서 비롯되는 삶을 비추고,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풍경이기도 한 ‘서울의 별’을 더듬는다.

상인들은 해산물을 손질하고 손님을 맞이하며 앉은 자리에서 곤히 잠들기도 한다. 상인들끼리 음식을 나누거나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며 시장의 일상을 살아간다. ‘단결-투쟁’이 새겨진 조끼도, 사람들의 진입을 막는 폴리스 라인도, ‘수협 OUT!’을 외치는 목요집회 또한 이들 일상의 단면이다. 이처럼 상인들의 목소리와 얼굴을 통해 일상과 투쟁을 교차로 보여주며 시장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전한다. 이것은 단순히 재개발로 인한 어느 장소의 파괴가 아닌, 당사자의 의미와 가치를 무시한 절대적 타인의 선택이 누군가의 삶에 어떤 균열을 일으키는지 보여준다.

<물의 도시> 스틸컷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줬던 별들’이 사라진 무수한 역사를 기억한다. 누군가의 터전이었고 우리네의 길잡이였던 곳들이 속절없이 스러져갔다. 약한 자는 속수무책으로 내몰렸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역사는 반복되어 왔다.

영화는 이 역사의 원형으로 콜럼버스의 항해를 불러온다. 발견하는 사람과 발견당하는 사람, 황금을 좇아 누군가의 경험과 기억을 지우고 신대륙을 만들어 온 발자취에는 이름 모를 고통의 이면이 존재했다. 반짝이는 것을 찾아 존재 가치를 부정해 온 역사의 대조는 착취를 성과로 삼아온 모래성의 실체를 확장하여 보여준다.

<물의 도시> 스틸컷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삶이 계속되듯, 상인들 삶의 일부로 그 지난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 안에서 영화는 ‘기억을 잇는 법’을 찾아 나간다. 노량진 수산시장의 지난날과 오늘날을 기억하고, 생명력을 잃어가는 ‘서울의 별’들이 지닌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빼앗겼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의미를 기억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기억의 가치로움을 믿는 에세이적 기록이자 시대를 관통하여 사회·문화 현상을 탐구하는 문헌적 기록이다. 이로 하여금 여전히 어딘가 묻어있는 삶의 흔적들을 되짚으며 저마다의 길잡이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투쟁을 이어가는 이들과 마음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스러져가는 빛일지라도 이를 기억하고 서로의 이음이 되어갈 때에 우리는 또 다른 역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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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다큐페스티발 사무국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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