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일기장

영화 속 그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선이, 지아, 보라의 일기

<우리들>

윤혜은 / 2020-02-13


영화가 끝난 후 영화 속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혹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적 없으셨나요. <우리들>의 선이와 지아는 화해한 뒤 예전처럼 친한 친구 사이로 돌아갔을까요? <캐롤>의 테레즈와 캐롤은 한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들은 자신의 삶을 어떤 색깔로 채워가고 있을까요. 퍼줌이 상상력을 발휘해 쓴 그들의 뒷이야기, ‘그들의 일기’를 보여드립니다.


선이 일기

2023년 7월 19일 수요일 / 태풍은 아직

“너네 고2 여름방학이 제일 중요한 거 알지?”

담임의 마지막 인사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수선한 6학년 교실에서도,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굴었던 중학교 2학년 때에도 주어만 바뀌었을 뿐, 같은 이야기를 들었었지. 그게 뭐라고 선생들은 하나같이 짠 것처럼 매년 여름방학의 막중함-정확히는 여름방학을 보내야 하는 우리들의 막중함-에 대해 강조하는 걸까. 설마 대학 교수들도 기말고사가 끝나면 ‘여러분, 여름방학을 잘 보내야 합니다’ 이러진 않겠지? 그런 게 대학이라면 가고 싶지 않다. 어차피 6월 모의고사 성적대로라면 인서울은 어림도 없지만.

창밖에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애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앞서 가는 애의 가방을 향해 슬리퍼를 던지거나 거리낄 것 없이 목청을 높이는 모습도 3층에서 내려다보니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냥 조금 한심하고, 조금 우스운 정도로 지나가는 풍경들. 멀리서는 대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실제보다 축소된다. 괜히 한 번 폼을 잡고 관대한 척을 하게 된다.

에어컨이 고장 나 창문을 열어둔 탓에 옥색 커튼이 크게 펄럭이며 내 얼굴을 때렸다. 태풍이라도 오려나. 커튼이 수상한 바람을 실어 나를 때마다 담임의 얼굴이, 앞에 앉은 승희의 뒤통수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담임의 말이 길어지자 승희는 뒤를 돌아보며 지루하다는 듯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종례가 끝나면 승희랑 뭘 먹으면 좋을지 생각했다. 비가 내릴지도 모르니 심심해도 동네에 있는 게 낫겠지. 아 맞다, 승희 오늘부터 다이어트한다고 했는데. 난 식이 조절은 도저히 못 하겠던데 그냥 줄넘기만 같이 한다고 할까……. 그때, 승희가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몸을 홱 돌렸을 때, 커튼이 한 번 더 크게 부풀어 올랐을 때, 왜였을까? 나는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승희는 그저 커튼을 흘깃 째려보더니 ‘아니야, 이따가’라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여름방학의 중요성을 처음 일깨워준 사람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쌤이다. 그해 여름은 여러모로…… 대단했다. 머릿속으로는 ‘고단’을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대단’이라고 써버렸네. 뭐, 대단히 고단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일기 쓰기가 숙제로 나오지 않는 방학을 보낸 지 아주 오래됐다. 그런 숙제도, 숙제 같던 여름도 내게 다신 없겠지. 더는 검사가 필요 없는 일기장에서 이렇게 마음껏 솔직해지고 있으니까. 이젠 오히려 할 말이 많아져 걱정이지만, 적어도 나 자신을 오해할 일은 없으니 안심이다.

참, 이걸 까먹을 뻔했네. 우리는 결국 맥도날드에 갔다. 승희는 버거 대신 스낵랩을, 음료는 다이어트 콜라로 골랐고 나는 더블치즈버거를 세트로 주문했다. 승희는 내 쟁반을 보며 울상을 짓더니 다음 주 보상 데이에 먹어야겠다며 햄버거를 크게 베어 무는 내 모습을 몰래 찍으려다 들켰다. 학원에 갔다 다시 만나기로 한 밤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서 승희랑 줄넘기를 500개씩 하고 왔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그런지 7시간 전 방학식이 꼭 7년 전 여름처럼 아득하다. 가끔은 모든 것이 똑같이 옛날 일이 돼버린다는 게 신기하다.



지아 일기

2019년 9월 7일 토요일 / 가을장마

추석을 앞두고 엄마를 만났다. 중학교 입학식 때 이후로 처음이다. 이제 내년에나 볼 수 있으려나? 그래도 생일 찬스가 남아 있으니 모를 일이다.

가을에 만난 엄마는 봄보다 예뻤다. 그사이 나는 키가 부쩍 커졌고, 할머니는 내 옷을 살 때마다 엄마 닮아서 멀대같이 크다며 못마땅해하는데 난 그 소리가 정말 듣기 싫다. (키가 커지면서 살도 쪄버리는 게 짜증이 날 뿐이다.) 엄마를 만나면 다 일러바칠 생각이었지만 막상 엄마 얼굴을 보니 할머니 생각은 1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차피 엄마 입장에서도 할머니 얘기를 달가워할 리 없으므로 나는 원래도 눈치껏 입을 다무는 편이다. 오직 할머니만 엄마와 보낸 하루를 꼬치꼬치 캐묻는다. 아! 너무 귀찮아!)

차에 올라타자 익숙하고도 낯선 엄마 냄새가 났다. 이제 예전처럼 내가 얼마나 이날을 기다렸는지 티 내려 하지는 않는다. 아니, 애써 감추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말투며 표정이 점점 무뚝뚝해지는 것 같다. 엄마도 느꼈을까? 엄마가 알아주면 좋겠다가도 또 괜한 오해를 할까 봐 무섭다. 아무튼 엄마를 만나기 전날이나 만나고 돌아오는 날에는 아주 예민하다.

그래도 언제나처럼 내가 가진 가장 예쁜 옷을 골라 입고 나갔다. (가장 예쁜 옷이지, 가장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엄마가 여성스러운 걸 좋아하니까, 그 취향을 맞추려 할 뿐이다.) 무릎을 덮을락 말락 하는, 초록과 남색이 섞인 체크무늬 반팔 원피스는 여름 소재여서 장마가 시작된 오늘 같은 날 입으니 좀 추웠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는데 엄마는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자기가 입고 있는 베이지색 카디건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미지근한 온기와 갓 구운 빵처럼 포근한 화장품 냄새가 훅 끼쳤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물도 찔끔 날 뻔했는데 왠지 참아야 할 것 같았다. 엄마 앞에서는 절대로 멍청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예쁘게 입었는데, 비가 내려서 춥겠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었다. 엄마 팔이 이렇게 희고 길었나. 나는 한참을 팔만 쳐다보다 그대로 잠들어버린 것 같다. 오늘은 멀리 있는 폐교 미술관에 갔다가 3층짜리 카페에서 비싼 케이크도 먹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빗속 드라이브다. 엄마는 하루 종일 민소매로 내 사진을 찍어주고 계산을 하고 운전을 했다. 나도 엄마 카디건을 입은 채로 집에 돌아왔는데, 할머니는 못 알아본 것 같다. 다행이다.

옷장을 열 때마다 엄마 냄새가 나면 좋겠다.



보라 일기

2016년 12월 23일 토요일 / 눈 오는 날

어제는 방학식을 했다. 엄마는 아침부터 가정통신문과 함께 배부된 방학 권장도서 목록을 체크하더니 도서관엔 언제 갈 거냐며 귀찮게 한다. 엄마의 시간은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걸까? 방학식이 바로 어제였다는 것조차 까먹은 사람 같다.

권장도서 목록 중 몇 개는 까만 별표가 그려져 있었다. 엄마는 뭘 읽고 싶으냐고 묻지도 않고 체크된 도서만 찾아서는 내 옆자리에 내려놓는다. 전화를 받고 올 테니 그동안 책 좀 읽고 있으란다. 보나 마나 지현이 아줌마겠지, 또. 맨 위에 보이는 책은 제목부터 별로였다. 혼자 되었을 때 보이는 것.

‘학교에는 많은 아이가 있다. 많은 아이 가운데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도서관에 가고, 혼자 화장실에 가고, 쉬는 시간에도 함께 수다를 떨 아이가 한 명도 없어 혼자 지내야 한다면! 세상에 그것처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왕따 얘기였다.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아서 책을 덮고 숫자가 제일 많이 쌓여 있는 단톡방을 훑었다. 어디부터 답장할까…. 그때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저 혹시 『혼자 되었을 때 보이는 것』은 한 권밖에 없나요?”

말끝을 올릴 때마다 까치발도 같이 드는 여자애, 이선이었다. 사서 선생님한테 내가 읽다 만 책을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잘 됐다는 생각에 이선에게 다가갔다.

 “야, 이거 너 읽어. 난 방금 다 읽어서.”
 “어? 어…. 정말? 고마워.”
 “내 것도 아닌데 뭐가 고마워.”
 “아니 그래도. 아, 근데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너가 마침 딱 읽었냐.”

이선은 자기가 생각해도 지나치게 친한 척을 했다고 느꼈는지 말을 해놓고 슬쩍 눈치를 봤다. 걔가 쓸데없이 긴장하는 게 눈에 보여서 내 마음도 괜히 불편해졌다.

 “나 먼저 갈게. 방학 잘 보내.”
 “그래…. 너도!”

이선이 반 박자 늦게 내 등 뒤에다 대답했다. 그게 너무나도 이선다워서 묘하게 짜증이 났다.

엄마는 이번엔 찬이 아줌마와 통화를 하며 차를 몰았다. 주차장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차창 위로 흰 눈이 소리 없이 달라붙었다. 아까부터 마지막으로 읽은 페이지가 은근히 신경 쓰였다. 이선은 그 책이 뭔지 알고나 빌린 걸까. 딱 자기 얘기라 기분만 나빠질 텐데.

그런데… 혼자가 되면 뭐가 보인다는 거지?

마침 저만치서 이선을 닮은 애가 우산도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데도 그 애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창문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가늘게 뜨자 이선의 뒤통수가, 옆모습이, 마침내 표정이 드러났다.

홀가분해 보이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창문에 붙어 있던 눈이 일제히 빗방울처럼 흘러내렸고, 그 위로 눈이 내리고 내리고, 또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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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프리랜서 인터뷰어이자 14년차 일기인간.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어떤책, 20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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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그들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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