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나의 첫 영화 연출기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영화

<너 나한테 왜 그랬어?> 제작기

장영선|영화감독 / 2020-07-30


‘처음’이란 말은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죠. 설렘이기도 두려움이기도 한 그것! 우리가 사랑하는 여성 감독들의 처음은 어땠을까요? 여전히 두근두근 소중한 기억일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부끄러움의 시간일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감독들이 직접 들려주는 ‘나의 첫 영화 연출기’를! 영화제작 과정부터 우당탕탕 좌충우돌, 따뜻한 메시지까지 < MY FIRST >에서 만나보세요!
장영선 감독 필모그래피
2019  <보충수업> 연출
2018  <4인의 뱀파이어> 연출
2016  <형이 돌아왔다> 연출
2015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연출
2013  <다정하게 바삭바삭> 연출
2012  <내가 같이 있어 줄게> 연출
         <나방스파크> 연출
2010  <너 나한테 왜 그랬어?> 연출
2005  <나는 기분이 좋아> 연출

처음 영화를 만들 당시의 내 상황을 설명해보자면, 나는 영화과 학생이 아니었다. 영상 관련 전공이긴 했지만 대체로 영상 전반에 대한 태도나 마음가짐 정도를 배웠을 뿐 영화 제작의 실무적인 영역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했다. 내가 생각해도 아는 것이 너무 없었지만 졸업용 논문을 쓰는 것보다는 단편 영상물을 제출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담당 교수님은 내가 퀴어 영화를 만드는 것을 줄기차게 반대하셨고 어찌어찌 내키지 않는 이야기를 써서 결국 제작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힘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일단 하고 싶은 대로 퀴어 영화를 만들어 본 후에 졸업작품을 찍자, 하고 만든 것이 나의 첫 영화 <너 나한테 왜 그랬어?>(2010)다. (참고로 말하자면 결국 졸업작품도 퀴어 영화가 됐다.)

막상 영화를 찍기로 한 뒤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집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뭔가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은 것 같은데 뭘 먼저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뭘 얼마나 열심히 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일단 누워서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가끔 선배들의 현장에 얼쩡댄 적도 있었고 책에서도 본 게 있으므로 일단 영화 제작의 핵심인 캐스팅과 스태프를 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너 나한테 왜 그랬어?> 스틸컷

친했던 친구들에게 스태프를 부탁하고 거절당하는 것들 반복하며 어렵게 팀을 꾸렸지만, 나는 전공자가 아니었던 탓에 아는 사람 내에서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을 구할 수가 없었다. 같이 교양 수업을 들어서 얼굴만 아는 영화과 학생에게 부탁을 했는데 그 학생이 약속을 두 번 미루더니 세 번째 약속 시간에는 차 사고가 났다고 해 그에게 다른 선배를 소개받았다. 그런데 그 사람도 사정이 생겨 또 다른 사람을 소개를 받고…. 결국에는 정말 처음 보는 사람과 촬영을 하게 됐다. 그 촬영감독이 조명감독까지 데리고 오기로 해서 촬영장은 친구들과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50대 50 정도의 비율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남성 퀴어 영화의 가장 큰 난항은 단연 캐스팅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영화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난항은 절대적으로 감독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정말 진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캐스팅이 어려운 것도 다 나의 부덕의 소치려니 한다. 내가 전생에 좀 더 착하게 살았다면 캐스팅이 한결 쉬웠을 것이다. 아니면 연출을 조금 더 잘해 지금보다 좋은 감독이었다면 캐스팅이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전자에 비해 후자에 확신이 없는 것은 나보다 좋은 감독님들도 어려움을 겪는 것을 목도해서 그렇다.

아무튼 그 때는 배우를 멀리서 구할 생각은 하지 못했고 학교 내의 연기과 학생들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다. 지금이나 그때나 10명에게 시나리오를 보내면 한 명에게 연락이 올까 말까다. 그래도 20명에게 보내면 그중 한 명은 (그것이 비록 거절의 의사라 할지라도) 반드시 연락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한동안 시나리오를 열심히 보냈고 고맙게도 답을 준 배우 두 명과 가벼운 오디션을 본 후 같이 작업을 하기로 했다. 

<너 나한테 왜 그랬어?> 스틸컷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쉽게 저지르는 잘못 중 하나가 예산이 적은 단편영화에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장면을 찍는 것이다. 나는 그간 여러 번 지속적으로 그 잘못을 저질러왔고 첫 영화에서 고행길을 시작했다. 고등학생들이 수업 듣는 장면을 넣은 것이었다. 30명의 학생, 30벌의 교복. 조연 역으로 내가 아는 남자 사람 전부를 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과 친구들은 물론이요, 내 친척 동생들과 내 동생을 짝사랑하는 남자애와 그의 친구들도 왔다. 그야말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교실을 채웠다. 그때의 빚이 아직도 남아 지난해에는 친척 동생이 감기로 아프다길래 용돈을 보내줬다. 인간이란 진 빚은 반드시 갚게 된다는 것을 실감한다. 

어차피 영화를 찍는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쉽게 빚을 지게 되는 일이므로 많은 조연이 등장하는 장면을 저예산으로 찍겠다는 마음은 버리는 것이 좋다. 그래도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지금도 뿌듯하니 찍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든 찍는 편이 좋겠다. 

다행히도 그 구하기 어렵다는 학교 로케이션은 당시 경기고등학교 교감 선생님이 의외로 쉽게 허락해주셔서 교실과 등굣길까지 한 번에 해결됐다. 몇 년 뒤 다시 그곳에서 찍을 수 있을까 싶어 찾아가 봤지만 그 선생님은 계시지 않았고 촬영을 거절당했다. 이로 깨달아야 할 것은 로케이션은 물론이고 영화 제작 시 마주치는 모든 상황은 대부분 운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니면 내 전생의 업. 그러니 짐작은 관두고 그냥 시도해보는 편이 낫다. 나머지 로케이션은 우리 집이었기 때문에 대충 모든 준비가 갖춰진 듯 보였다. 

<너 나한테 왜 그랬어?> 스틸컷

당시 촬영 현장은 약간 냉랭했다. 현장 분위기를 한 줄로 요약해보자면 ‘우리는 교실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을 때 한자리에 모여 먹지 않고 각자 따로 먹었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연출이 처음이다 보니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모르고 헤매느라 스태프들을 챙기는 것은 완전히 뒷전이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규모가 작은 현장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분위기는 더 데면데면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외로 나보다 배우들이 현장의 분위기를 불편해했던 것 같다. 배우들은 촬영장에서 영혼을 쓰는 사람들임을 고려했을 때 좀 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좋았겠다는 생각을 나중에 했고, 그 이후로는 그 점에 유의하고 있다. 

그러나 촬영장의 분위기 또한 운에 맡겨야 하는 것 같다. 어느 때에는 좋고 어느 때에는 나쁘다. 그냥 그러려니 하며 너무 신경 쓰지 않는 편이 좋다. 다만 그 분위기가 배우들의 연기를 방해할 정도라면 곤란하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할 수 있도록 대한의 배려를 해주는 편이 모두에게 좋다.

<너 나한테 왜 그랬어?> 스틸컷

모든 촬영 현장이 그렇듯 여러 갈등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당시 밤샘 촬영이 새벽으로 넘어가자 모두가 지쳐서 날카로워졌다. 연출부 중 한 명이 우리를 위해 30분마다 시간을 알렸는데, 스태프 중 한 명이 그 친구를 따로 불러 한 번만 더 시간을 말하면 죽여버린다고 하는 것을 얼핏 듣게 됐다. 나는 바로 그에게 가서 무슨 말을 하신 거냐 물었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얼굴을 굳힌 채 불만은 나에게 직접 말하라고 하자 안 그래도 냉랭했던 분위기가 더욱 차가워졌다.

그 때문인지 직후에 이뤄진 촬영은 온전히 내 의견만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결과적으로 나쁘진 않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찍지 못했다는 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이후에 그 스태프가 따로 연출부 친구에게도 사과하고 나에게도 사과했기 때문에 감정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스태프를 꾸릴 때 꼭 미리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알아보는 습관을 들였다. 이 과정은 당연한 것이지만 처음 연출을 할 때는 마음이 급하고 스스로를 잘 믿지 못해 내가 이런 것까지 따져도 되나, 여러 생각을 하면서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야 갈등이 생겨도 그나마 합리적으로 마무리가 된다. 나 같은 경우는 여성혐오와 퀴어혐오를 내비치는 사람과는 일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다. 

촬영장에서 일어날 갈등이나 불행은 피한다고 해서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것들은 언제나 대비하지 않은 방향으로 오기 때문에 감내하는 것이 제일인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전생의 나를 탓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너 나한테 왜 그랬어?> 스틸컷

촬영 당시 공간 확보 때문에 내 침대 하나를 분리해서 집 밖으로 빼 두었다가 촬영이 끝난 후 재조립을 했다. 그 과정에서 후배가 나에게 나사 한 주먹을 쥐어주며 ‘선배, 분명 아까랑 똑같이 조립했는데 왜 나사가 남는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그 나사들을 받아서 신발장 구석에 우르르 쏟아두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새벽에 자다가 대지가 뒤흔들리고 땅이 꺼지는 느낌을 받아 이것은 지진인가 종말인가 하고 눈을 떴다가 침대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곧이어 신발장 속 나사 한 주먹이 떠올랐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침대는 그냥 버리기로 했다. 그 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도 침대 없이 살고 있다. 

첫 촬영보다 아름다운 에피소드가 많았던 촬영장도 있었고 제작과정이 비교적 특이한 촬영장도 있었으므로 그런 것을 글로 쓰면 많은 분들에게 더 많은 재미와 정보를 드릴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일단은 코너의 취지에 따라 첫 촬영 당시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써보고 싶었다. 영화 촬영이란 사람에 따라서 재미있을 수는 있지만 쉬울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찍기 시작하면 영화는 반드시 만들어진다. 이것은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과도 같아서, 내가 어떤 사람이든 이곳의 분위기가 어떻든 간에 일단 현장에 나가 촬영을 시작하면 영화는 반드시 찍힌다. 그리고 그 영화는 영원히 남는다. 

<너 나한테 왜 그랬어?> 스틸컷

그러니 영화를 찍고 싶으신 분들은 일단 현장으로 가서 찍으시길 바란다. 그러나 이것 또한 명심하자. 영화를 보면서 그 날의 현장을 떠올리며 고통받는 사람이 없도록 감독은 반드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이상적인 말일 수 있겠지만, 영원할 우리들의 영화를 보며 영원히 행복한 우리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감독이 되고자 한다. 부디 모두 함께 그런 감독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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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돌아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정하게 바삭바삭> 등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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