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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박남옥 감독과 <미망인>의 위치 생각하기

손시내|영화평론가 / 2020-04-09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박남옥 감독(가운데)

박남옥은 1955년에 영화 <미망인>을 만든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다. 그는 1923년에 태어났고 식민지 조선과 해방, 전쟁을 거치는 동안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영화평을 쓰기도 했고, 촬영소에 들어가 편집을 배우기도 했으며 자신의 영화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미망인>은 그런 그의 첫 영화이자 유일한 영화이고, 여성이 만드는 영화라는 조건 속에서 제작비 마련부터 배급까지 온갖 고군분투 끝에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내적으로는 전후의 사회상을 드러내고 여성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이 작품은 기존 한국영화사 서술 안에서 종종 누락되거나 중요하게 이야기되지 않았는데, 1997년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며 새로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니 박남옥 감독과 그의 영화 <미망인>이 소개되고 이야기되는 맥락은 영화사와 비평, 영화 제작 현장 등 영화 안팎의 구조를 건드리고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는 시도와 궤를 함께할 수밖에 없다. 영화 제작과 관련해 어떤 시도들이 좌절되어왔고, 어떤 영화가 조명되지 못했으며 영화계에 어떤 편견과 억압이 여전히 남아있는가를 되묻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 스틸컷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남성 중심적인 권력 구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동시에 여성의 영화 만들기를 보다 복합적으로 사고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1997년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이래로 박남옥 감독과 <미망인>이라는 영화를 주목하려는 시도는 계속돼왔고, 임순례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2001)는 인터뷰에 임하는 그의 목소리를 직접 담기도 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도 한국 영화 100년을 맞은 2019년의 풍경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다. 역사를 정리하고 돌아보는 특정한 시점의 시대 인식, 역사를 대하는 다양한 태도들을 압축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기념과 균열 사이 어딘가에 <미망인>을 호출하려는 시도도 놓여있었던 것 같다. 

<여판사>를 연출한 홍은원 감독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일 텐데, 그동안 가려지고 누락됐던 여성 영화인의 존재를 조명하고 그들을 영화사 속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이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 역사상 최초의 여성 감독인 알리스 기의 이야기를 다룬 파멜라.B.그린의 <자연스럽게: 알리스 기-블라쉐의 전해지지 않은 이야기>(2018), 여성 감독들의 영화를 통해 영화사를 살피는 마크 커즌스의 <영화를 만드는 여성들: 시네마를 여행하는 새로운 로드무비>(2018) 등의 작품에서 그러한 노력을 찾아볼 수 있겠다. 

박남옥을 시작으로 <여판사>(1962)를 만든 홍은원, <민며느리>(1965)를 연출하고 배우로도 널리 알려진 최은희는 물론이고 다양한 세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한국영화사 속 여성 영화인들의 이름을 발견하고 호명하는 일은 ‘기념할 만한 해’를 맞은 한국 영화계의 역사적 작업 중 하나인 것 같다. 

박남옥 감독

그러나 누락되고 잊혔던 이름들을 바로 그 누락과 배제를 통해 만들어져온 역사 속에 다시 위치시킨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 이름들을 기존 서술에 기계적으로 덧붙이는 것으로, 배제의 역사는 돌아보지 않고 그저 대단한 개인들을 끄집어내 나열하는 것으로 기념할 만한 ‘우리의 역사’가 완성된다면, 이전에는 ‘우리’에 포함되지 않았던 우리들은 거기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비판하고 균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늘날 박남옥 감독과 <미망인>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질문들을 멈추지 않고 던지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영화계뿐 아니라 다양한 직군과 역사의 현장을 가로지르며 마주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서 지워졌던 여성을 발견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도 많아지고 있지만, 여성의 진입과 활동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가능케하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공고한 구조를 구축해온 질서에 대한 냉정한 검토와 비판 없이 새로운 실천이 충분히 이뤄지기는 힘들 것이다. 

<미망인> 스틸컷

이는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여성을 예외적이고 영웅적인 개인으로 구별해내려는 시도나 기존의 역사에 별다른 마찰 없이 여성을 편입하려는 태도 둘 다를 지양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여성사, 젠더사, 지성사 연구 등에서 중요한 저작을 발표해온 역사학자 조앤 월라치 스콧은 프랑스 페미니즘의 역사와 선구적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을 다루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여성들이 본받을 만한 영웅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정치적, 문화적 경쟁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섬세하게 검토할 수 있게 하는 장소, 즉 역사적인 위치 혹은 지표다.”(『페미니즘 위대한 역사』) 

이는 여성을 개별적 의지가 없는 대상으로 보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을 구체적인 사회,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려는 노력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개개인의 행위자들은 구조의 영향을 받으며 그것을 재생산하고 유지하기도 하고, 구조의 모순적이고 문제적인 부분들을 그 자체로 드러내고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여성 창작자 역시 그러하다. 그러니 여성 영화인을 조명하는 것, 그들의 작품을 본다는 것이 본받을 만한 정답과 폐기해야 할 오답을 가르는 일이 될 필요는 없다. 영화가 당대 사회와 어떻게 호흡하고, 어떤 것을 사건화하며, 어떤 인물들을 등장시키는지 들여다보며 함께 나눌 질문들을 발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실천이 될 것 같다.

<미망인> 스틸컷

박남옥의 <미망인>은 6·25 전쟁 이후 굵직한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던 ‘전쟁 과부’를 소재로 삼고 있다. 당대의 거리 풍경과 생활상, 의복의 대비 등이 드러나는 가운데 딸아이인 주를 데리고 사는 주인공 신자(이민자)가 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에게 어느 날 낯선 여자가 찾아온다. 다짜고짜 신자를 모욕하는 여자는 자신을 이성진 선생의 아내라고 소개하는데, 그는 죽은 남편의 친구다. 여자는 두 사람의 외도를 의심하다 이내 돌아가는데, 실제로 이 선생은 신자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고 있고 두 사람은 종종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처럼 신자에겐 부양해야 할 어린 딸과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경제적 문제 그리고 단정하기 어려운 애정 관계가 그물처럼 얽혀있다. 이는 한편으로 전통적 가치에서 벗어나 근대화된 사회에서 흔들리고 변화하는 여성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아내와 엄마처럼 가정 내에서의 역할만이 허락됐던 이전과 달리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거나 자유로운 성적 욕망을 드러내며 공적 사회로의 진입을 시작하는 것이다. 

<미몽> 스틸컷

물론 그러한 모습을 전면에 드러내는 영화로서 <미망인>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앞선 시기에 제작됐으며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발성 영화인 양주남 감독의 <미몽>(1936) 또한 근대적 여성의 모습과 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미몽>의 주인공 애순(문예봉)은 남편도 뿌리치고 딸도 내버려 둔 채 백화점에 드나들며 사치스러운 소비를 즐기고, 아예 집을 나가 젊은 애인과 호텔에서 생활하기도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혹은 <미망인>의 제작 시기와 비슷한 때인 1956년 개봉해 그해의 흥행기록 1위를 달성한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도 함께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자유부인>은 대학교수와 그 부인 선영(김정림) 각자의 연애, 양품점에서 일하며 사회생활에 눈뜨고 춤도 추러 다니게 된 선영의 모습을 그리며 공적 영역에 진출한 여성을 둘러싼 갈등을 보여준다. 

<자유부인> 스틸컷

<미몽>이 그리는 근대적 여성은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우며 서늘한 얼굴이고, 그 말로 또한 대단히 가혹하다. <자유부인>의 화법과 톤은 이를테면 풍속도에 훨씬 가깝게 느껴지고 결말에 이르면 선영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기 위한 문턱에 선다. 이러한 두 사례와 비교했을 때 <미망인>의 신자에겐 어딘지 생활인에 가까운 면모가 엿보인다. 그는 근대적인 욕망과 두려움이 투영된 대상이라기보다는 삶의 고단함을 지고 살아가려 노력하는 현실적인 인물에 가깝고, 그에게 주어진 운명 또한 여성 캐릭터에게 주로 허락됐던 단죄나 신성시와는 거리가 있다.

<미망인>에는 신자와 이 선생, 그 부인뿐 아니라 부인의 젊은 애인인 택, 택의 옛 애인인 진이 등장한다. 이들은 줄곧 조합을 달리하여 서로를 만나고 연애하는가 하면 서로를 배신하고 떠나간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이르면 신자는 택과 함께 지내며 양장점에서 일을 시작하고 딸의 거처를 고민하게 된다. 현재 전해지는 <미망인>의 판본은 결말부가 유실되고 후반부의 사운드 또한 온전치 못한 상태인데, 신자는 딸과 떨어져 지내며 돈을 벌고, 진과 함께 있는 택은 끝내 신자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미망인> 스틸컷

어느 것은 포기하고, 어느 것은 잃은 어떤 무력함의 정서가 신자를 감싼다. 박남옥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유실된 결말부는 신자가 다시 딸과 함께 꿋꿋하게 살기로 결심하며 이사를 가는 장면을 담고 있다고 한다(『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필름 유실은 언제나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영화의 종결 그 자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로 인해 모든 것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운 시기, 당대의 복합적이고 불안정한 조건 속에 놓인 여성의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박남옥 감독과 <미망인>이 호명되는 맥락을 생각하다 길어진 단상들을 얼기설기 엮어 보았다. 역사 속에 가려졌던 여성 영화인들에 주목하고, 여성 창작자들의 작업을 조명하는 흐름 속에서 여성을 ‘정치적, 문화적 경쟁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섬세하게 검토할 수 있게 하는 장소’로서, ‘역사적인 위치 혹은 지표’로서 바라보려는 노력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온갖 불합리와 차별적인 경험들을 모두 짊어지고 분연히 싸워나가는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자신이 발 딛고 선 땅의 부조리를 감지하는 존재, 이상적이고 올바른 선택지와 충돌하고 긴장하며 오히려 세상의 모순을 드러내는 존재로서 그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더 다양하고 풍부한 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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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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