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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너와 나의 이어짐

강유가람 <우리는 매일매일>, <시국페미>

정지혜|영화평론가 / 2020-03-09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우리는 매일매일> 스틸컷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페미니즘이 맞서며 돌파해온 그간의 화두는 무엇이었고 그 운동성은 어디에 방점이 찍혀 있을까. 시대별, 상황별, 국면별 페미니스트들 간의 연대와 연결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만약 그 연결이 때론 단절됐다면 혹은 불가능했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고 또 어떻게 다시 만들어갈 수 있을까.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온 이들에게도 때론 이 질문들이 막막하고 거대한 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에 페미니스트들은 이 물음에 최대한 구체적인 방식으로 끈질기고 굳건하게 응수하며 페미니즘이라는 너른 토대를 굳건히 해왔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독해하는 관점과 언어, 태도야말로 페미니즘의 가장 큰 동력이자 이론이며 생활양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짐작하건대 영화감독 강유가람 역시 이 질문들을 맞닥뜨리고는 그로부터 비켜서지 않고 응답하기 위해 두 편의 영화 <시국페미>(2017)와 <우리는 매일매일>(2019)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태원> 스틸컷

강유가람은 인터뷰에서도 말한 바 있듯 조연출로 참여한 <왕자가 된 소녀들>(김혜정, 2012) 때부터 자신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한국의 개발 경제사의 단면을 읽게 한 <모래>(2011) 등을 거치며 꾸준히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영화를 만들어 왔다.1) 최근 개봉한 <이태원>(2016)도 흔히 ‘한국에서 가장 이국적인 공간’이라고 말해지곤 하는 이태원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다.2) 

그 가운데서 <시국페미>와 <우리는 매일매일>은 페미니스트로서 자기 정체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면화하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페미니즘이 직면해온 온갖 부당과 불평등, 혐오의 구체적인 사례를 자연스레 청해 듣게 한다. 두 편의 영화는 약간의 제작 시차가 있고 영화에 등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경험의 시차 역시 존재하지만 ‘페미니즘’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서로의 거울 쌍이며 페미니즘 사(史)로 봤을 때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두 작품을 같이 보고 나면 페미니스트들 간의 긴밀한 연대와 서로간의 쟁점의 교차가 맞붙기를 바라는 강유가람의 완곡하지만 강렬한 바람까지도 읽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스틸컷

<우리는 매일매일>부터 말하는 게 좋겠다. 제작은 <시국페미>가 먼저 됐지만 강유가람에게 <우리는 매일매일>은 꽤 오래전부터 만들고 싶었던 영화였다. 영화는 1990년대 후반 대학 생활을 시작했던 강유가람의 자전적 목소리로 시작한다. 그때 강유가람이 체득하고 배웠던 페미니즘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시선이자 자기 경험을 기술할 수 있게 해준 새로운 언어였다. 그 시절을 지나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강유가람은 새삼스럽지만, 또한 긴급하게 그때 그 시절을 함께했던 페미니스트들의 삶과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 자신에게 페미니즘이라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젖혔던 1990년대의 ‘영(Young) 페미니스트들’, 그가 ‘팬심’으로 힘껏 흠모하고 함께하고자 했던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페미니즘이 그저 한때의 유행이나 특정 시기의 활동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와 경험, 사유 체계와 세계관이라면,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발화해온 이들은 세월의 거친 풍파 속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지속적인 삶의 동력으로 가져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궁금증에는 그 자신의 현재적 고민까지 포함돼 있다.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에 이어 미투 운동이 터져 나왔다.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변혁의 시기, 이 거대한 흐름과 파열 속에서 강유가람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영화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강유가람은 당면한 질문 앞에서 그때 그 시절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가 보기로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스틸컷

여성주의 활동 상담원이었던 키라는 현재 정읍에서 수의사로 일한다. 지난 시절, 페미니스트로 살며 끊임없이 누군가를 설득하고 투쟁해야 했던 게 힘겹기도 했다.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며 소싸움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총여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던 써나는 8년 차 대기업 직장인이다. 직장 내에서 페미니스트 전사가 돼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생각과 달랐다. 써나는 직장, 결혼이라는 조건 앞에서 협상의 지점을 고민한다. 제주에 사는 짜투리는 제주여민회 활동을 한다. ‘영 페미니스트’3)로서 주로 단체를 만들며 살아왔던 짜투리로서는 기존의 단체에 가입한다는 게 낯설지만, 이 변화가 활력이 돼주는 듯하다.

특히 짜투리의 이러한 활동은 서울 중심에서 벗어나 비수도권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간다는 의미를 짚어보게 하고 무엇보다 짜투리가 영 페미니스트 이후의 페미니스트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짜투리는 자신보다 앞선 페미니스트들을 부정했던 과거와 달리 그들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복원하고 그걸 기반으로 제주의 ‘영영 페미니스트’들과의 연결을 바라고 있다. 강유가람은 여기에 잠시 자신의 목소리를 덧붙여둔다. ‘독고다이도 멋있지만 때로는 더불어 한 길도 좋은 거 같다.’ 여성주의협동조합 병원을 운영하는 어라,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된 오매, 음악 활동을 꾸준히 이어온 흐른까지. 활동의 강도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일상에서 페미니즘을 새롭게 갱신하고 실천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스틸컷

강유가람은 <우리는 매일매일>을 위해 카메라를 들고 페미니스트들 친구들을 찾아갈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방문이, 오랜만의 만남이 정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 될 수 없음을. 페미니즘에 있어 정해져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움직여가는 삶의 역동과 활동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매일 매일을 살아가며 “나랑 같이 싸울 수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이 여정의 가장 큰 수확이다.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건 뭘까’라는 질문에 ‘자기 인생의 모든 국면에 대해서 더 나은, 더 좋은 고민을 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인생’이라는 잠정적 대답을 듣고 돌아오는 일 역시 가장 힘 있는 회신이다.

강유가람은 자기 삶의 방향을 잡아갈 때면 아마도 이 친구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 친구들에게 연대의 뜻과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강유가람은 흐른이 함께 만든 노래 <우리는 매일매일>의 가사를 잠시 옮겨본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이토록 깊은 바다인지는 몰랐지/우리들은 매일매일 여기 바다를 헤엄치네/가끔은 숨이 차올라/제자리를 맴돌까 봐…서로에게 신호를 보내줘/깜깜한 바다를 겁내지 않도록/너를 놓치지 않게 깨어있을게/언제라도 이어질 수 있게.’

<시국페미> 스틸컷

‘이어짐’에 관해서라면 좀 더 섬세하고 치열하며 긴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강유가람은 ‘영 페미니스트’와 자신 사이의 이어짐을 고민하면서도 그것을 과거에 매몰된 지난 이야기에 그치거나 노스탤지어의 회고담으로 그리려 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들이 처한 현재적 상황을 직시하고 그다음 지평을 어떻게 넓혀갈 것인가를 묻고 싶어 한다.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결, 현재이자 미래의 페미니즘에 관한 기록이 바로 <시국페미>다. 2016년 서울 강남역에서 벌어진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후, 한국 페미니즘 운동이 맞이한 중요한 전기와 그 후 촛불 광장으로 이어진 페미니즘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전한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자기 정체를 인식하고 활동하는 ‘지금, 여기’의 페미니스트들의 인터뷰로 진행된다. 박근혜와 그 비선 최순실의 적폐가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을 두고 여성이라는 이유를 들며 여성혐오적 발언을 서슴없이 쏟아내던 이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모인 열린 광장에서조차 여성들을 위협하던 여성혐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시민으로 생각지 않고 오직 성애화된 여성 육체에 초점을 맞춰가던 광장의 발언들까지. 페미니스트들은 그 어디도 아닌 바로 이 광장에 서서 그 오랜 여성 차별과 여성혐오에 정면으로 맞선다. “페미니즘 없이 민주주의도 없다”는 구호를 외쳤고 “미스 박은 더는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는 말에 “차별 발언하지 말라”고 말한다.4)

<우리는 매일매일> 스틸컷 

이 과정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서로가 함께 목소리를 낼 때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고,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건 우리가 서로의 용기가 된다는 걸 아는 것”이라는 사실도 다시금 확인했다. 그리고 “여성 대통령이 여성의 실패가 아니라면 페미니즘 정치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나”와 같은 질문도 남았다.

<우리는 매일매일>과 <시국페미> 속 페미니스트들 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겪어야 했던 성차별과 혐오는 무척 닮았다. 동시에 페미니스트들 간의 시차만큼이나 각 시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직면한 사회적 조건과 국면 역시 상이하다. 서로 간의 이어짐의 접점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이 유사와 차이의 지점을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의 정동과 변화, 질문과 응답을 발 빠르게 담으며 한국 페미니즘 역사의 영화적 레퍼런스가 돼준 강유가람의 작업들이 내게 남긴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비켜서지 않고 응답하기, 함께할 동료가 있음을 기억하기. 그렇다. 영화와 페미니즘에서 습득한 것을 적용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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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독립영화제 2019에서 진행한 감독 인터뷰 참조

2) ‘한국에서 가장 이국적인 공간’이라는 이 말은 이태원이 ‘한국이 아닌 외국 같다’는 말로 이해되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이태원은 한국 전쟁과 분단사에 이은 주한미국 정착의 역사가 집약돼 있고 외국인 노동자 및 다문화주의와 관련된 논의가 가능하며 도시 재개발과 관광 지구화 이후 급속도로 젠트리피케이션을 경험한 공간이다. 그런 이태원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공간’이 아닌가. <이태원>은 이러한 이태원의 삶의 조건을 때론 적극적으로 취하고 때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3) ‘영 페미니스트’(Young Feminist)는 1990년대 중반에 등장해 2000년대까지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페미니스트 그룹이다. 권위적, 획일적 관계를 부정하며 평등한 개인의 관계 맺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편 2015년 이후 온라인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을 이전과 구분해 ‘영영 페미니스트’(Young Young Feminist) 혹은 넷 페미니스트(Net-Feminist)라고 부르게 된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넷페미史』 참조.

4) 필자가 쓴 인디다큐페스티발 2018 프로그램 노트 일부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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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2018 부산국제영화제 한국단편 예심 진행, 공저 『아가씨 아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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