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몸짓으로, 제나 롤런즈

손시내|영화평론가 / 2020-02-27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글로리아> 스틸컷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고, ‘좋은 연기’의 기준이란 대단히 모호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배우의 연기와 관련해 접하게 되는 소식 중에는 분명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것들도 있다.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했다는 기이하고 위협적인 행동, 상대 배우에게서 진짜 감정을 이끌어내겠다는 핑계로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액션을 기습적으로 취하거나 연출자가 그것을 강제하기도 한다는 일화 같은 것이 특히 그렇다. (완전히 일반화할 수는 없겠으나, 이것이 성별과 경력 등의 권력구도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짚어야 할 것이다) 

이런 오인된 즉흥성을 마주할 때 종종 의아해지는 건, 그러한 작업의 결과가 그저 현실적인 폭력과 표정의 일회적이고 일방적인 기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건 현실의 불확실함을 끌어안고 거기에 몸을 맡기려는 태도가 아니라, 그것을 어설프게 흉내 내거나 통제 아래에 두려는 태도이기에 폭력적이며 오히려 소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와 같은 소식을 접하는 피로감 가운데서 종종 떠올리게 되는 이름이 있는데, 바로 제나 롤런즈다. 

제나 롤런즈는 1930년에 태어나 연극, 텔레비전, 영화를 오가며 연기활동을 이어온 미국의 배우다. 그는 90살이 된 최근까지도 꾸준히 영화를 찍어왔지만, 영화적 동지이자 남편이었던 영화감독 존 카사베티스와의 작업을 빼놓고는 롤런즈의 연기활동에 대해 온전히 이야기하기 어렵다. 두 사람은 학생 시절에 만나 1954년에 결혼했고 카사베티스가 병으로 사망한 1989년까지 함께 살았다. 그 자신이 유명한 배우이기도 했던 카사베티스와 롤런즈는 감독과 배우로서 7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었고, 동반 출연했던 영화까지 합하면 10여 편이 된다. 

<사랑의 행로> 스틸컷

물결치는 금발, 강인함과 불안함이 함께 일렁이는 눈, 길게 빼어 문 담배와 종종 일그러지는 입, 높으면서도 깊은 목소리, 길게 팬 보조개와 함께 롤런즈를 인상적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건, 어떤 규정도 거부하는 불확정적인 그의 몸짓이다. 롤런즈 역시 배역에 대한 이입과 심리묘사를 기본으로 하는 배우이지만,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우리를 동일시의 몰입과는 또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사랑의 행로>(존 카사베티스, 1984)에서 롤런즈가 연기한 사라의 대사를 빌리자면, 그 자신 또한 “어디로 갈 건지 아직 정확히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여러 차례의 리허설을 바탕으로 즉흥적인 촬영방식을 고수했던 카사베티스와의 작업에서, 롤런즈는 기꺼이 삶의 불확실함과 더불어 영화라는 현실을 살아가는 강렬하고 고독한 얼굴로서 존재했다.

<글로리아> 스틸컷

규정을 거부한다는 것이 스테레오 타입으로 굳어진 특정한 역할을 흔드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하며 <글로리아>(존 카사베티스, 1980)를 먼저 떠올려본다. 갱스터 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이 영화에서 롤런즈는 주인공인 글로리아 스웬슨을 연기하는데, 영화에선 그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모호한 채로 제시되고 또 남겨진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뉴욕 브롱스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마피아에 의한 총격전으로 한 이주민 가족이 무참히 살해되고, 그 집의 6살 난 아들 필(존 애덤스)만이 옆집 글로리아에게 맡겨져 목숨을 부지한다. 이후 두 사람은 필의 아버지가 남긴 마피아의 비밀 회계장부를 들고 집을 벗어나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 총성과 도주의 무대에서, 글로리아는 무구한 얼굴을 하고 보호받거나 남자들의 주변부에서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게 아니라 냉정한 얼굴로 총을 쏘며 거리를 가로지르는 여자로 등장한다. 과거 한때 마피아 보스의 연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남자들이 장악한 뒷골목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은 채 영화의 한 가운데에 서있다.

<글로리아> 스틸컷

<글로리아>는 인물들의 상태와 상황에 대해 많이 설명하지 않는 영화다. 행동들의 연쇄에도 이유와 인과가 충분히 부여되지 않는다. 아이들을 싫어한다는 글로리아와 고집 센 필의 위태로운 동행은 그들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제쳐두더라도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데, 아마도 이 관계가 끝내 규정되지 않기에 그럴 것이다. 필을 떼어놓고도 다시 지켜주기를 반복하는 글로리아의 선택은 보호본능이나 모성애 같은 단어들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사이와 간극을 메우는 것은 납득 가능한 해석과 감정의 묘사가 아니라, 글로리아가 쏘아대는 총성과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는 두 사람의 발걸음뿐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글로리아에게 “당신은 내 가족이며 친구이고 여자친구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필의 대사는 어쩌면 그처럼 불확실하고 복합적인 관계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영화의 후반부 마피아 보스가 글로리아에게 “규칙을 알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을 떠올리며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글로리아는 규칙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그는 단지 갱스터 영화의 성별이 반전된 주인공일 뿐 아니라 관습적인 신화적 주인공의 자리 또한 슬며시 흔드는 인물이다.

그처럼 규칙을 벗어나 관객에게 약속된 믿음이나 확신을 주지 않는 인물이란 롤런즈와 카사베티스의 다른 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테마다. 앞서 언급했듯 즉흥성을 통해 영화의 형식 자체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롤런즈의 인물들은 한 곳에 쉽사리 고정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의 영화를 보는 것은 종종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정돈된 형식과 언어에서 벗어나 제나 롤런즈의 얼굴에 일렁이는 미세하고 미묘한 감정을 그 자체로 마주할 수 있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영향 아래 있는 여자> 스틸컷

<영향 아래 있는 여자>(존 카사베티스, 1974)는 그러한 경험이 극대화되는 영화다. 여기서 롤런즈가 연기한 메이블은 그야말로 충동과 혼란의 인물이라 할 만하다. 그는 LA에서 토목 건설 노동자인 남편 닉(피터 포크) 그리고 어린 세 아이들과 사는 가정주부다.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하며 가정에 최선을 다하는 그는 그러나,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일종의 신경쇠약 상태에 놓여있다. 메이블은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혹은 무례하다고 여길 법한 말을 늘어놓는가 하면, 때로는 일상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기억을 잊은 것처럼 행동하고, 불안정하고 난폭한 상태가 되어 주변 사람들을 근심케 한다. 메이블이 결국 남편에 의해 시설에 보내졌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147분에 달하는 영화 줄거리의 거의 전부다.

요약된 줄거리에 담기지 않는 영화의 세부는 대체로 신경증적이고 변덕스러우며 화기애애하기도 한 일상적 장면들로 구성된다. 그 일상 속 메이블의 얼굴엔 당황스러움과 공포, 기쁨과 슬픔, 기대와 실망, 짜증과 사랑스러움이 무질서하게 담긴다. 방향을 잃은 듯한 그의 몸짓은 말 그대로 스크린을 가로지르며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그처럼 통제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 힘과 그것을 억누르는 모종의 영향 사이의 대치, 그 틈새로 새어나오는 이상한 흥분의 감각이 영화에 먼지처럼 쌓인다.

<영향 아래 있는 여자> 스틸컷

그 모든 것이 폭발하는 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다. 닉과 가족들은 6개월 만에 돌아오는 메이블을 환영하기 위한 파티를 준비하는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불러 모은 탓에 닉과 그의 어머니(캐서린 카사베티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고 갑작스레 비도 내리기 시작한다. 결국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마련된 자리에 합류한 메이블은 전에 없이 의기소침한 모습이다. 그러다가 실은 그 자신 또한 줄곧 아슬아슬한 상태였던 닉이 폭력성을 분출하고, 메이블이 그로부터 도망치다가 불현 듯 춤을 추는가 하면, 이들 사이에선 끝내 물리적인 폭력이 발생하기도 한다. 가정이 깨져버릴 것만 같은 아찔한 순간에, 닉과 메이블 사이에 오가는 찰나의 눈짓이 완전히 다른 차원을 열어버린다. 곧바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이들을 재우고 식탁을 정리하며 유리문을 닫아 거실과 침실을 나누는 일련의 동작이 이어지는데 이는 당황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갑작스러운 중단과 분리는 흡사 무대의 철수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문과 커튼 너머로만 언뜻 비치는 그들의 침실에서 여전히 불가사의한 삶이 지속되는 것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다.

<오프닝 나이트> 스틸컷

그처럼 현실과 픽션을 나누는 동시에 섞어버리기도 하는 무대의 문제는 <오프닝 나이트>(존 카사베티스, 1977)에서 보다 전면에 등장한다. 롤런즈와 카사베티스의 작업 방식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영화에서, 롤런즈는 유명한 배우인 머틀 고든을 연기했고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여자연기자상을 받았다. 

머틀은 주연을 맡은 연극 ‘두 번째 여인’의 개막을 앞두고 여러 번에 걸친 사전 공연을 하는 중이다. 그러다 비가 내리는 어느 날 그를 광적으로 좋아하던 팬인 17살 소녀 낸시(로라 존슨)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한편 연극은 중년에 접어들며 위기와 불안을 느끼는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머틀은 도무지 그 연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연기할 수가 없다. 연출자 매니(벤 가자라)와 작가인 사라(조안 블론델)는 머틀이 역할에 녹아들어 온전히 그 인물이 되길 바라지만, 그는 매니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대본에 없는 대사를 하거나 객석을 향해, 혹은 동료 배우 모리스(존 카사베티스)를 향해 말을 걸며 극의 몰입을 깨뜨리기도 한다.  

<오프닝 나이트> 포스터

표면적으로 머틀의 갈등은 나이 들어가는 한 여자가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 만들어낸 낸시의 환영을 보고, 이제는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젊음의 감각에 다시금 접속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그의 갈등이 그보다는 훨씬 복잡한 층위의 것임을 알게 된다. 그가 맞서고 있는 건 ‘나이 들어 희망을 잃은 여자’라는 배역이 아니라, 현실을 포괄하지 않는 견고한 연극의 벽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자신의 고통에 갇힌 채로 때로는 유쾌하고 부드럽게, 머틀은 주어진 연극의 형식 안에 현실을 불러오고 지속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연기 방식을 모색해나간다.

이는 온전히 머틀의 의지와 의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건 아니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대망의 오프닝 나이트에 그는 만취한 채로 나타나 비틀거리며 무대에 오른다.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건 불확실하고 중층적인 현실의 감각을 받아들이고 포함하며 그것을 (폭력적으로 통제하는 게 아니라) 껴안은 채로 극을 구성하려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나 롤런즈는 그러한 과정의 얼굴로서, 고정되지 않는 몸짓으로서, 그래서 너무나 경이로운 존재로서 우리에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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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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