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읽다

두 여자는 용기 내어 길을 걷는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장영선|영화감독 / 2020-02-27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찰스 허먼 움펠드 | 2001 | 멜로/로맨스, 코미디 | 미국 | 96분
|청소년 관람불가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스틸컷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찰스 허먼 움펠드, 2001)는 몇 번의 변곡점을 지난다. 스물여덟의 제시카(제니퍼 웨스트펠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연애를 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보수적인 집안의 간섭이 귀찮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주변 사람들이 결혼과 임신 등의 ‘사회적 안정 궤도’를 걸어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제시카의 마음 또한 복잡해진다. 하지만 제시카는 소개팅을 통해 여러 남자를 만나지만 그 어떤 남자에게서도 설렘을 느끼지 못한다.

한편 헬렌(헤더 예르겐슨)은 자유분방한 영혼의 예술가로, 다양한 성적 매력을 탐구해보고 싶어 한다. 그는 갤러리에서 마주친 어떤 여자와 인상적인 눈빛 교환을 한 순간을 계기로 자신이 이제껏 유일하게 경험해보지 못한 레즈비언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그의 게이 친구들은 이 결정에 대해 함께 자유롭게 토론한다. 이러한 도입부는 이 영화가 아주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의 사랑을 이뤄나가는 로맨틱 코미디의 좋은 시작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스틸컷

제시카와 헬렌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헬렌은 신문에 여성 연인을 찾는다는 광고를 내고, 그에게 연락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제시카와 만난다. 보수적인 제시카는 자신이 먼저 연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헬렌을 만나자 두려움에 뒷걸음친다.

헬렌은 자연스러운 만남을 유도하고 결국 제시카의 마음을 열어 그녀와 키스하는 것에 성공한다. ‘다른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되는 내용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영화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제시카의 직장 상사이자 전 남자친구인 조쉬(스콧 코헨)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감독은 영화 초반부에 조쉬를 등장시킬 때부터 어딘지 모르게 그의 얼굴을 너무나도 잘 ‘보여’줬다. 그런 그가 무용한 주변 인물일 리는 없겠지만 설마 이 관계에 끼어들까,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관객들은 제시카에 대한 조쉬의 과도한 관심에 슬그머니 의심이 든다. 그러나 퀴어 영화에 주인공의 성적 지향과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인물이 갈등의 주요 원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는 이 로맨틱 코미디의 방해꾼인 것이군, 하고 결론을 내린 채 우리는 두 명의 여성 주인공을 지켜본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스틸컷

제시카와 헬렌의 사랑은 시작됐다. 보수적인 제시카는 키스에서 더 이상의 진전을 원하지 않고 헬렌은 ‘진중한 부치’의 마음으로 그녀의 속도를 존중한다. 헬렌이 제시카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제시카가 어서 마음을 활짝 열어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이렇게 애타고 더디는 것이야말로 로맨틱 코미디의 정수라고 생각했다.

헬렌은 제시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하고, 결국엔 제시카의 집안 모임에 초대된다. 그리고 그 날 밤 그들은 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관계 후 제시카의 얼굴은 밝지 못하다. 그래, 애타고 더디게. 로맨틱 코미디니까. 

제시카는 주변 사람들에게 헬렌과의 관계를 숨기지만 헬렌에게서 사랑과 지지를 얻은 후 훨씬 더 긍정적이고 생기 넘치는 사람으로 변한다. 헬렌은 게이 친구들로부터 ‘정체성은 흉내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너는 퀴어를 기만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러나 헬렌은 진심으로 제시카를 사랑한다고 항변한다. 그런데 제시카를 만나기 전의 헬렌은 훨씬 더 여유롭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었지만, 제시카를 만난 후 제시카의 그림자가 되어버린 헬렌의 눈빛은 공허해지고 만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스틸컷

이제 위기를 극복할 차례다. 제시카는 헬렌의 정체가 드러날까 두려워 친오빠의 결혼 소식을 헬렌에게 숨긴다. 그들은 이 문제로 다투고, 그 후 헬렌은 결혼식에 참석해 이제까지 제시카가 헬렌에게 내주지 않았던 사생활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성공한다. 그리고 제시카의 어머니는 제시카와 헬렌의 관계를 먼저 알아채고 그들의 관계를 인정해주기까지 한다. 이제는 그들의 관계는 행복만이 남아야 마땅하다. 로맨틱 코미디의 장르적 특성이란 그런 거니까.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영화는 변곡점을 갖는다. 친오빠의 결혼식에서 마주친 제시카와 조쉬의 대화가 어딘지 모르게 애틋한 것이다! 불안한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화면은 조쉬를 점점 더 클로즈업하고, 제시카와 조쉬는 결국 키스를 해버린다. 제시카를 찾으러 온 헬렌의 웨이스트 샷과 조쉬의 바스트 샷이 교차로 보일 때, 씬의 마지막 마무리가 혼자 남은 조쉬의 표정일 때 관객들은 슬슬 영화의 엔딩을 예상할 수 없어진다(혹은 믿고 싶지 않아진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포스터

제시카와 헬렌은 동거를 시작한다. 두 사람은 때때로 행복하고 때때로 행복하지 않다. 둘의 문제는 주로 섹스에 관한 것이며, 주요 원인은 섹스를 즐기지 않는 제시카에게 있다. 제시카는 헬렌을 사랑하고 헬렌도 제시카를 사랑한다. 다만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스포일러지만 그들은 결국 헤어지고 친한 친구가 된다. 제시카는 조쉬와 재회하고, 헬렌은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는 다른 여자친구를 만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제시카와 헬렌은 친한 친구로서 조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다. 이 영화는 제시카와 헬렌이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이뤄내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퀴어 영화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영화는 퀴어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진실하고 솔직한 시선으로 담고 있다.

정체성은 퀴어 영화의 오랜 테마다. 이성애가 다수의 성적 지향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동성에게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퀴어 당사자에게도 중요한 점이지만, 비 퀴어들이 퀴어를 이해하게 되는 데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실제로 영화 안에서 제시카의 어머니는 정체성을 ‘가보지 않은 길’의 개념으로 이해한다(정확히는 어떤 연극 안에서 선택하지 않은 배역에 빗대어 설명하한다). 실제로 그 길을 걸어 끝까지 가봐야만 그 길에 무엇이 있는지, 그 길이 아름다운 길인지 아닌지, 그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제시카와 헬렌은 둘 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 진지한 여행을 한 사람들이다. 시작과 끝이 어찌 됐든, 이들은 최선을 다해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최종적으로는 각자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것으로 이들의 여행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스틸컷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시카 역의 제니퍼 웨스트펠드와 헬렌 역의 헤더 예르겐슨이 너무나도 잘 어울려 두 사람이 완벽한 연인으로 탄생하는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배우는 외양부터 시작해서 목소리와 말의 빠르기, 각자의 몸을 움직이는 방식까지 모두 확연하게 다르지만 같이 있을 때의 합은 거의 완벽에 가깝다.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두 배우가 궁금해져서 찾아본 정보에 따르면, 이들은 놀랍게도 이 영화에서 작가, 배우, 프로듀서의 역할까지 함께 했다고 한다.

맨 처음 작가 워크숍에서 만난 두 사람은 악몽 같은 데이트를 그려보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연극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로 발전시켜 1997년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렸고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는 연극을 영화로 제작하겠다고 결정한 뒤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해 4년 후 실제로 영화화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는 관객과 평단의 지지를 고루 얻으며 성공했다. 실로 엄청난 재능이 아닌가! 이토록 새롭고 넓은 퀴어 영화를 보게 해 준 두 배우들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같은 영화들을 보게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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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돌아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정하게 바삭바삭> 등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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