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카메라를 들고 대화하며 기억하기

델핀 세리그에 대한 짧은 이야기

손시내|영화평론가 / 2020-08-13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델핀과 카롤> 스틸컷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에서 소개된 칼리스토 맥널티의 <델핀과 카롤>(2019)은 배우 델핀 세리그와 비디오 아티스트 카롤 루소풀로의 공동작업과 우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두 사람이 만나고 함께 작업하며 서로를 투쟁 동지로 여겼던 70년대는 여성의 몸, 섹슈얼리티, 재생산, 노동 등에 관한 문제의식과 실천이 쏟아져 나왔던 시기이자, 과거도 역사도 학교도 없는 새로운 매체인 비디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시기였다. 남성의 언어가 아니라 스스로의 언어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자 했던 여성들은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고, 델핀과 카롤은 그러한 비디오 작업에 일찍부터 뛰어든 선구자들이었다. 카롤 루소풀로가 1945년생, 델핀 세리그가 1932년생이니 두 사람이 완전히 비슷한 또래였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열정과 즐거움으로 무장한 채 열띤 이야기를 주고받는 둘의 모습에는 친구이자 동지라는 표현이 더없이 어울린다. 델핀 세리그는 1990,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2000년대 중반이 되어 카롤 루소풀로는 델핀 세리그에 대한 영화 만들기에 착수했지만, 영화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그 또한 2009년에 세상을 떠났다.

60년대와 70년대 프랑스 영화계의 스타였던, 아름다운 외모와 모호한 표정, 지적이고 신비로운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델핀 세리그는 당대 유명한 감독들과 다양한 영화를 함께했다. 50년대 중반부터 텔레비전 시리즈와 단편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던 그는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1961)<뮤리엘>(1963)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 후 델핀 세리그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도둑맞은 키스>(1968), 자크 드미의 <당나귀 공주>(1970), 해리 쿠멜의 <어둠의 딸들>(1971),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과 같은 영화에 두루 출연하며 이 시기 프랑스 영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됐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스틸컷

이 영화지난해 들에서 세리그는 주로 사람이 아니라 여신’(<도둑맞은 키스>)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과거와 현재가 모호하게 뒤섞인 세계의 미지의 여인(<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말 그대로 요정(<당나귀 공주>)이나 불멸의 아름다움을 가진 흡혈귀(<어둠의 딸들>), 미숙한 남자 주인공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도둑맞은 키스>)이 되어 도저히 잊기 어려운 첫 등장의 순간들을 스크린에 새겼다. 그렇게 유혹과 매혹, 미궁의 여자가 되었던 그는 중산층의 이미지를 조롱하고 유희하는 역할(<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도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냈다. 이 영화들이 영화사에 중요하고 의미 깊게 남아있는 만큼이나, ‘영화에서 미지와 매혹과 아름다움이란 너무도 자주 여성의 이미지를 통해 제시되곤 한다는 점을 짚어두도록 하자.

<델핀과 카롤> 스틸컷

<델핀과 카롤>은 델핀과 세리그의 그러한 배우로서의 모습과 페미니스트 투사로서의 모습을 굳이 분리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대신 이 영화는 델핀과 카롤의 유머러스하고 힘찬 비디오 작업처럼 이미지의 맥락을 확장하고 거기에 목소리를 덧붙이면서 영화와 현실의 복잡한 관계를 가시화하려 노력한다. 영화의 도입부에는 델핀과 카롤이 1975년에 공동으로 연출한 <마조와 미조 배 타러 가다>의 한 장면이 삽입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의 여성부 장관이었던 프랑수아즈 지루가 출연한 한 텔레비전 토크쇼를 편집하고 유쾌한 사이자막을 삽입하며 창작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덧붙이면서, 때로 여성 혐오적인 분위기에 일조하고 맞장구치기도 하는 여성을 개인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이처럼 델핀과 카롤은 직접 카메라를 들고 기록했거나 녹화한 영상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현재의 여성 그리고 여성의 이미지가 사회 전체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밝히고 바로 거기서부터 저항의 언어를 발견해내는 작업을 했다. <델핀과 카롤> 또한 세리그가 배우로서 참여했던 영화들에서 여성의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을 떼어내거나, 그 역할들에 델핀 세리그 자신이 논평을 덧붙이는 토크쇼 장면들을 이어 붙이며 여성 배우와 배역 사이의 관계, 여성과 영화 사이의 관계를 보다 복합적으로 사고하게 한다.

세리그가 스스로 밝혔듯 그가 68혁명으로 인해 가장 크게 영향 받았던 지점은 페미니즘을 만나고 페미니스트로서 사고하게 된 일이었다. 드디어 언어를 찾은 것 같았다고 회고했던 그는 카롤 루소풀로와 함께 꾸준히 비디오 작업을 하며 거리에서 여성들을 만난 한편, 남성 작가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영화계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던 여성 작가들과 적극적으로 협업했다. 70년대 중반, 그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여성적 체험이라 할 만한 것을 보여주는 영화들을 찍었다.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1975),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 송>(1975)과 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이 영화들은 가정, 비서구와 같이 타자화된 공간을 들여다보고, 배우의 퍼포먼스를 통해 그곳의 균열과 모순을 포착한다. 여기서 델핀 세리그는 불안과 질서 사이에서 위태로워하며, 권태로움과 허무함을 가까스로 견디다 어느 순간 더는 그 상태를 버티지 못하는 여자들을 연기했다. 드라마틱한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작과 몸짓을 유심히 보게 함으로써 여성의 시간을 영화 속에 살려내고 어긋남을 드러내는 표현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는 쉽게 간과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되는 여성적 활동을 가시적인 곳에 꺼내놓으면서 낯설게 보도록 하고, 영화에서 페미니즘적 실천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를 숙고해보게 만든다. 델핀 세리그는 그처럼 주제나 내용 면에서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새로운 영토를 용감하게 누비는 탐험가였다.

<델핀과 카롤> 스틸컷

<델핀과 카롤>의 말미에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각종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해 페미니스트로서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펼치던 세리그는 영화계에서 점차 자리를 잃어갔다. 대형 제작사나 이름 있는 남자 배우들이 점차 그와 작업하길 꺼려해서였다. 아직까지도 되풀이되고 있는 이러한 안타까운 현상을 기억에 새기면서, 80년대 초반 세리그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활동을 언급하며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하나는 델핀 세리그가 스스로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비 프리티 앤 셧 업>(1981)이다(촬영은 카롤 루소풀로가 맡았다). 그가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 활동하고 있던 여성 배우들을 만나 인터뷰한 기록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여성 배우들은 일하면서 겪은 성차별, 외모에 대한 참견과 강요, 억압, 제한적인 배역 문제 등에 대해 직접 이야기한다. 카메라 앞의 배우들과 델핀 세리그의 사려 깊고 열정적인 대화들은 당시의 문제적 상황을 고발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영화, 새로운 배우의 역할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세리그의 질문은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른다. 그는 자신의 동료인 여성 배우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여성들 사이의 친밀함과 따뜻한 우정을 다룬 영화를 찍어본 적이 있나요?” 답변은 한결같이 아니오이지만, 그들의 눈은 이미 그러한 질문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분노와 약간의 설렘이 어리며 빛나 보인다.

다른 하나는 시몬 드 보부아르 시청각 센터를 설립한 일이다. 일찍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열광적인 독자였고, 그 자신이 카롤 루소풀로와 함께 <동성애 혁명 행동 전선>(1971), <그럼, 그 짓 하지 마!>(1971, 이 작품은 임신중단에 관한 기록이다), <리옹 성매매 여성들의 파업>(1975)과 같은 작업을 통해 여기와 저기의 여성들을 카메라에 담은 기록자였던 델핀 세리그는 시청각 센터를 통해 여성에 의해 촬영되었고, 여성을 촬영한 모든 여성운동의 기록을 모으고 보존했다. 그처럼 다른 여성들에게 말 걸고 서로를 기억하기 위한 활동을 해나갔고, 여성의 이미지가 놓인 모순적인 자리를 이해하고 해방과 저항의 무기를 발견하길 멈추지 않았던 델핀 세리그. 그가 안겨주는 깊은 영감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를 끊임없이 일깨워줄 수 있다면 좋겠다.

<델핀과 카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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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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