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이해 없는 ‘여성 서사’의 역설

예외의 폐지를 위하여

송아름|영화평론가 / 2020-07-30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여기저기 이곳저곳, 많은 이야기 앞에 붙은 ‘여성’이라는 단어가 익숙하고도 이상한 요즘이다. ‘여성’이라는 단어가 붙은 다양한 담론들에 대한 옹호와 거부는 이제 누군가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정치적이라는 것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저 타인에게 생각하고 변화할 거리를 발견하게 해주는 일이라는 점에서 젠더에 대한 문제의식은 분명 일상의 정치를 가능하게 할 중요한 이슈였다. 특히 요즘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는 적어도 이에 대해 알고 있어야, 그리고 그간의 상황에 대한 심각함을 인지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조금이라도 진일보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했다. 이렇게 ‘중요(해 보이는) 사안’에 ‘동조하(는 듯 보이)기’ 위해 얄팍한 단어로서의 ‘여성’이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비롯하여 각종 창작물에서 자주 사용되는 ‘여성 서사’라는 뜻 모를 단어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연 여성 서사란 무엇인가? 최근 이 단어를 앞세운 많은 작품이 쏟아지고 자주 해석의 기준이 되지만, 과연 무엇이 그냥 서사가 아닌 ‘여성’ 서사로 불리고 있는 것인지를 뜯어보면 그 내부는 텅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먼저 여성 서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영화들을 통해 대강의 쓰임을 추측해보자면, 작품 내 여성 역할의 비중이 커졌거나 여성의 역할이 사건의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경우 혹은 여성 감독이 만든 이야기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자체로 큰 변화인 것은 맞다. 지금도 그리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2010년대 초반 지겨울 정도로 반복됐던 남성 영화들 사이에서 여성 인물들 혹은 이야기는 설 자리가 없었고 그 참담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현재 ‘여성 서사’라 불릴만한 영화들이 많아진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옹호는 한편으로 큰 오해를 불러들인 듯하다. 즉 여성의 등장‘만’으로 특별한 의미를 담았다고 믿는 거대한 착각이 깊숙이 스며있는 것이다. 

<악녀> 스틸컷

이 오해는 먼저 긴 시간의 억압과 배제를 너무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을 바탕에 둔다. 그래서 역할 바꾸기라는 아주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 어설픈 실천으로 이어진다. 오랫동안 남성들이 점유해 온 자리, 그것의 대체. 여성 액션과 여성 느와르라는 존재하지도 굳이 존재할 필요도 없는 장르들은 그 결과였다. 영화 <악녀>(정병길, 2017)나 <미옥>(이안규, 2017)은 기존 액션 영화에서 물리적인 힘과 대결의 승리자를 여성에게 할애하면서 마치 ‘여성도 싸울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최선을 다해 전시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이 그 이상을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든 총이나 칼의 현란함이 장식했던 전반부를 지나는 순간 노골적이라 할 만큼 훤하게 드러난다. 강력해 보이는 신체의 내면에 진실로 사랑하던 남성을 겨눠야 하는 아픔과 자신이 보살펴주지 못한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는 여성, 그렇게 그들의 현란함은 불쌍하고 안타까운 것으로 전락한다. 

이런 영화들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또 이러한 변화에 공감할 만한 이들을 어설프게 겨냥하기 위해 가장 쉽고도 낮은 수를 던졌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손쉬운 여성 인물의 ‘첨가’는 여성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감정’이 이성애적 기준을 바탕으로 남성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연약한 여성과 선천적으로 ‘탑재’된 모성을 유지하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단죄를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결국 가장 중요하게 뒤엎어야 할 두 가지를 고스란히 부여잡은 영화들은 손쉽게 ‘여성’ 서사를 구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로 인해 퇴행한다. 그저 변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에 급급한 영화들은 이 변화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혹은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으면서 ‘여성’을 단순한 수식어로 전락시킨다.

<반도> 스틸컷

최근 개봉한 <반도>(연상호, 2020)에서도 그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반도>에서 카 체이싱을 담당하고 아이들의 안위를 위해 전사처럼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여성들로, 이 작품의 여러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성 인물을 영화 내 중요한 역할을 행할 수 있는 액션 장면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되묻고 싶다. 과연 이 영화 속 여성 인물이 카 체이싱 장면에 배치되었다고 해서, 혹은 총을 들고 좀비를 쏘아 죽인다고 해서 여성 인물의 무엇이 혹은 영화의 무엇이 바뀌었는가? 이 역할들을 남성으로 바꾼다 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그저 남성들이 해왔던 역할을 여성에게 부여했다는 것 자체가 ‘칭찬’해야 할 일인가? 여성들의 부각이 일반적이고 당연한 일로 생각되지 못하는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식의, 즉 여성의 등장 그리고 그것만으로 의미를 획득했다고 착각하는 것, 그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믿는 것은 정작 중요한 그들의 이야기로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최악으로 치닫는 경우 이는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여성 중심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을 때 특히 여성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피해를 이야기할 때, 이는 같은 고통을 겪은 피해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축소되어 버리는 식이다. 여성들의 이야기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취급될 때, 공감을 위해 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또 다른 여성 인물이 요구된다.

<마돈나> 스틸컷

<귀향> 스틸컷

영화 <마돈나>(신수원, 2015)에서는 임신한 채 위독한 상태로 병원에 실려 온 한 여성의 행적을 간호사인 또 다른 여성이 쫓는다. 병원에 실려 온 여성의 과거는 몸을 팔고 그 사이 남성들이 좋아하는 ‘서비스’를 배우고 그 방법으로 살아가다 버림받은, 고발이라는 말로도 차마 덮이지 않는 고통으로 가득 차있다. 이렇게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살아남아 병원에 실려 왔을 때 그에게 연민을 보내는 이는, 그 와중에도 임신한 아이를 버리지 않는 이에게 상반된 자신의 과거를 비춰보는 간호사의 죄책감이다. 한 여성이 사회로부터 완전하게 버림받은 채 죽음의 문턱까지 간 이 상황은 왜 비슷한 경험을 한 이의 죄의식으로만 위로받아야 하는가? 한 여성을 위로하고 공감을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식을 죽인 어미라는 설정은 그들끼리의 고통 분담 이상으로 넘어서기 힘들다.

더욱 직접적인 예는 <귀향>(조정래, 2015)이나 <눈길>(이나정, 2015)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작품은 모두 현재의 일본군 ‘위안부’ 내러티브에 아픈 사연을 가진 어린 소녀의 현재를 얹는다. <귀향>과 <눈길>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이들은 늘 제한된 공간에서 묵묵히 괴불노리개를 만들거나 과거에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환영과 마주하며 홀로 살아간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들의 삶에 끼어드는 것은 자신들이 과거 일본군 ‘위안부’로 착취당할 때와 비슷한 나이의 소녀들이다. 문제는 이 소녀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과 외로움에 공감할 수 있을 만큼의 피해를 뒤집어 쓴 이들이라는 점이다. <귀향>의 소녀는 성폭행을 당한 후 아버지까지 잃은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하다 무당에게 맡겨지고, <눈길>의 소녀는 가난과 무관심, 그리고 폭행이 따라다니며 심지어 자퇴까지 강요받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들의 아픔은 이미 또 다른 아픔을 겪은 바 있던 이들과 동화되면서 결국 고통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취한다(심지어 <귀향>의 소녀는 신기(神氣)로 인해 과거 일본군 ‘위안부’가 겪었던 고통을 고스란히 경험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다른 누구도 아닌 비슷한 아픔을 겪은 이들끼리의 소통은 단어 차원의 피상적인 ‘여성’이 의미 있는 용어로 사용되지 못한 채 부유했을 때의 최악의 결과를 보여준다.

<눈길> 스틸컷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해서 굳이 ‘여성’을 부각시킬 필요는 없다. 이러한 행위는 이미 이 단어 자체가 예외적이라는 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해 없이, 그리고 고민 없이 ‘여성 서사’를 남발할 때 수많은 누군가의 이야기는 보편이 될 기회를 잃어버린다. 여성과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 작품을 무조건 옹호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강력한 신체적·정신적 힘을 돌출적인 것으로 그리는 작품들은 오히려 여성 서사의 역설을 불러들일 공산이 크다. 특별할 것도 호들갑스러울 것도 없다. 또 다른 성(性)만이 보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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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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