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M IN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평범하고도 역사적인 ‘청년’으로 호명되기까지

송아름|영화평론가 / 2020-07-02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청년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절망이 필요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어느 때나, 어느 세대나 자신이 속한 ‘우리’가 가장 억울하고 또 안타까울 테지만 수치적으로까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낙인찍힌 세대는 전례를 찾기 힘들다. 윗세대에 대한 반감이 이다지도 노골적으로 생산된 때 역시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과거가 어땠고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가 ‘Latte’와 ‘horse’라는, 이젠 유희로 소비될 수 있을 만큼의 유행어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결국 견디고 견딘 끝에 다다른 해탈을 의미할 것이다. 도무지 벗어날 수 없다면 놀리기라도 하고, 알아듣지 못한다면 소소한 복수가 될 수도 있을 이 소심한 응징은 현재의 청년들이 불만조차 조심스럽게 운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 앞에 닥친 생존의 문제는 물리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시간 중에도 경력을 쌓고,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대단한 역량을 발휘하며,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무작정 달려야 하는 모순과 맞물려 있다. 

사실 영화에서 청년들의 이야기는 꽤 오랫동안 다루어졌다. 이야기했듯이 늘 ‘우리’가 애달픈 청춘들은 언제나 있어 왔고 그들 나름의 위안 혹은 폭발은 영화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1970년대의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이나 1980년대의 <바람불어 좋은 날>(이장호, 1980) 등은 당대 청년들의 상황을 드러내는, 그리고 모두가 공감하는 메인스트림에서의 영화들로 자리 잡는다. 1990년대의 <초록물고기>(이창동, 1997)나 <비트>(김성수, 1997), <태양은 없다>(김성수, 1998)와 같은 영화들 역시 ‘방황’의 문제와 함께 언급되면서 사회로 갓 진입하거나 진입하려는 이들의 불안을 그려내며 당대 담론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청년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모두의 관심을 받는 이야기가 아니었고 진영을 바꾼다. <마이 제너레이션>(노동석, 2004)이나 2010년대의 <잉투기>(엄태화, 2013), <족구왕>(우문기, 2013), <10분>(이용승, 2013) 등은 현재의 청년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궁극적으로 ‘앞날 없음’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독립영화 안에서 부글대며 끓고 있었다.

<바람불어 좋은 날> 스틸컷

정치적인 문제의식이든, 빈곤에 대한 냉철한 시각이든, 취업과 먹고산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든 간에 영화계 내에서 청년은 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청년들에겐 늘 정체 모를 거대한 짐이 지워져 있었고, 그것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선택 자체로 청년 서사는 사회적 문제의식과 맞물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청년들의 이야기가 쌓였으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은 ‘청년’에 대한 젠더적 상상력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을 포함하여 현재까지도 ‘청년’이라는 기호의 중심엔 남성이 놓인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동해 바다에 고래를 잡으러 가겠다며 희망과 좌절을 오가는 것도, 서울로 상경하여 빈곤 속에서 좌절하는 <바람불어 좋은 날>의 세 청년들도 모두 남성의 목소리로 발화된다. 90년대에서 현재까지의 영화들 역시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이 사이에서 여성들은 학점을 바꾸어 달라고 교수를 찾아가 울거나(<바보들의 행진>), 남자친구의 헛된 꿈을 지적하면서도 은근한 기대를 하며(<바람불어 좋은 날>), 남성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주거나 배신하는(90년대의 영화들) 역할에서 그리 멀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처음 청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던 때 ‘여성’ 청년이라는 단어가 따로 만들어졌던 것은 청년의 디폴트가 남성이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생존의 문제로 간주되는, 돈을 벌고 지위를 높이고 이를 위해 어떤 식으로든 정치에 개입해야 하는 모든 일이 남성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물론 이는 청년에 국한된 일만은 아니다. 미혼 남성은 앞으로 가정을 꾸리기 위해, 기혼 남성은 가장이기 때문에 함부로 일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미혼·기혼의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여성이 ‘가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다양한 이유’로 쉽게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청년 서사를 설명할 때에 여성 역시 생존의 영역에 걸쳐 있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전혀 다른 영역에서 이야기된다. 

<마녀> 포스터

청년의 서사의 중심에서 여성을 찾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막상 찾는다 해도 그들은 직원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극도의 예민함을 견디지 못해 광기를 보이거나(<마녀>(유영선, 2013), <오피스>(홍원찬, 2014)), 성폭력 피해를 시작으로 사회로의 진입 자체에 장애를 겪는 일 사이에 놓인다(<마돈나>(신수원, 2014), <성혜의 나라>(정형석, 2019)). 즉 앞으로를 계획하는 일의 시작부터 평범한 삶의 대열에서 밀려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사실일 수는 없다. ‘여성=예민함’으로 퉁 쳐버리는 것이나 성폭력을 빼곤 젊은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삶에 대한 계획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겪어내야 하는 기본값인 생존을 고려하지 않는 결과이다. 이러한 틀은 치열하게 현재를 고민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파악하며, 그것으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 수순이 동일하게 청년기를 보내고 있는 여성들에게 적용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젠더적 고통에 어설프게 접근하며 단순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최근, 사회에 진입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여성들의 모습이 스크린에 그려지면서, 당연했지만 배제되었던 한 축의 청년들이 안정을 찾고 있다.

<소공녀>(전고운, 2017)의 미소(이솜)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하나씩 포기해야 할 것을 결정한다. 그의 결정은 전적으로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붙잡기 위한 자발적 선택이다. 그가 포기하려는 것이 모두가 최후의 꿈처럼 생각하는 내 집 마련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내려놓는 용감한 포기 뒤에는 행복이 놓인다. 누군가가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해도 나는 내 속도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청년들의 바람은 미소를 통해 함께 실현된다.

<수성못>(유지영, 2017)의 희정(이세영)은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현재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곳을 떠나야 한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조금만 열심히 하면 이곳을 벗어나 자신보다 나은 이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정의 꿈은 다른 이들이 아무리 무시해도 끝까지 놓지 않을 희망이다. 미소와 희정이 가지고 있는 앞으로에 대한 희망은 평범한 청년이 그리는 당연한 청사진이었음에도 여성에게 부여되며 되뇔 기회를 얻는다. 당연한 것이 생경해지는 이 아이러니는 얼마나 오랫동안 청년의 한 축이 실종되었었는지를 보여준다. 

<소공녀> 스틸컷

<수성못> 스틸컷

<벌새> 스틸컷

또한 <벌새>(김보라, 2018)에서의 영지(김새벽)는 앞 세대 청년의 서사를 흥미롭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벌새>의 영지는 은희(박지후)와의 나이 차이, 그가 부르는 노래 <잘린 손가락>이나 재개발을 바라보는 시선 등을 통해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 약자의 편에 섰던 운동권 학생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를 거쳐 온 여성들이 해당 시기를 지난 후의 후일담 소설들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생각하면 영지의 등장은 매우 중요하다. 영지는 비슷한 연령임에도 학생들에게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는 구호를 외치게 하는 은희의 담임선생과 다른 태도로 학생들을 대한다. 그리고 그는 이야기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은 세상이지만 그곳에서 쉽게 무력해지면 안 된다고. 영지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행동으로 인해 쉽게 꼰대의 것이 되지 않을뿐더러, 힘들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영지의 모습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거나 과거에 심상해진 남성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몸으로서 등장하는 후일담 소설의 여성들과 분명하게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여성 감독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 또 여성들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여성들의 평범함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청년의 서사라 할지라도 일상이 배제된 채 극단에 놓인 이들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흘러가는 이야기는 이제야 조금씩 도착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다른 청년들의 이야기가 그런 것처럼 일상적이면서도 사소함에 멈추지 않는, 어느 한 세대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벌새>가 우리가 누리는 감정조차 개인의 것만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제 여성들의 일상은 한 세대의 것, 시대의 것, 청년의 것, 역사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이들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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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ZOOMER

2014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시네마 크리티크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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