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플데이

영화와 관객 그리고 세상으로의 연결

넘실대는 파도 위 여성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

<파도 위의 여성들>

퍼플레이 / 2019-09-18


2019년 하반기 ‘퍼플데이’ 상영회 주제는 <지금, 당신의 자리에서>입니다. 여성이라는 구획은 많은 공통점을 주지만, 어쩌면 내부에는 그보다 더 많은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 차이로, 자신의 위치에서 고민은 시작되고 이어집니다. 퍼플레이에서 하반기 퍼플데이를 위해 준비한 영화들은 어쩌면 조금은, 그 고민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질문은 무엇인가요? 지금, 당신의 자리에서 이어나가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파도 위의 여성들|감독 다이애나 휘튼|출연 레베카 곰퍼츠|2014|다큐멘터리|미국|90분

안녕하세요? 언제나 가까운 여성영화, 퍼플레이입니다. 9월 퍼플데이 상영작은 <파도 위의 여성들>이었습니다!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은 네덜란드 의사 레베카 곰퍼츠가 설립한 비영리단체입니다. 임신중단이 불법인 나라의 여성들을 돕기 위한 프로젝트 이름이기도 하죠. 여성들의 재생산권을 지키기 위해 레베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냅니다. 바로 네덜란드 선박을 타고 국제 수역으로 나가 임신중단 시술을 하는 것이지요. 공해에서는 그 선박이 등록된 나라의 법이 적용되고, 네덜란드는 임신중단이 합법인 국가라는 점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파도 위의 여성들은 임신 초기에 복용하면 임신중단이 가능한 임신중절 유도약도 함께 싣고 나갑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레베카와 활동가들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힙니다. 낙태 반대 단체를 비롯해 정부, 군사기관은 그들의 배가 항구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언론까지 그들의 활동을 비난하죠. 하지만 그따위 저지에 물러설 여성들이 아닙니다. 그에 맞서 레베카는 다양한 방법들을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그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울컥하게 되고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죠.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왜 여성이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거야?’ ‘임신과 출산 그리고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오로지 여성에게 있다고. 왜 남자들이 이래라 저래라지?’

도대체 왜 아직도 낳을 권리, 낳지 않을 권리를 여성이 갖지 못하는 건가요. 화가 나고 답답했습니다. ‘파도 위의 여성들’로 온 수많은 이메일과 전화들. 그 속에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괴로워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겨있었습니다. 그들은 임신 사실을 주변에 털어놓지도 못하고 공포와 외로움을 오로지 혼자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초국적으로 연대하는 활동가들을 보며 위로받았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영화 상영 후에는 『유럽 낙태 여행』을 출간한 봄알람의 이민경 작가님과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여성의 몸과 재생산권을 비롯해 낙태죄 헌법불합치 이후를 내다보는 이야기를 나눴지요. 이날의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유럽 낙태 여행』이 기획된 계기가 영화 <파도 위의 여성들>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2017년 2월쯤 한국에서 막 낙태죄가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레베카 곰퍼츠를 만나러 가자’는 말이 나왔고 ‘그럼 유럽으로 가보자’고 해서 유럽의 낙태 이슈 관련 인물들을 여럿 만나게 됐습니다. 레베카 곰퍼츠를 만난 후 원래는 함께 칠레로 가려 했는데, 한국에서 같이 협업을 해보자고 해서 이후 활동도 기획하게 됐습니다.

-레베카와 어떤 말을 나눴길래 그가 한국에 오게 됐나요?
레베카는 초국적 연대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되게 창의적이에요.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데 이번엔 원격 의료를 해보자고 한 거예요. 저희를 만나기 전에 이용했던 게 드론이었어요. 레베카가 신기술에 관심이 많은데요,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지역에서 드론을 이용해 임신중절 유도약을 전해주는 거죠. 그럼 그 약을 먹고 여성들이 임신중단을 할 수 있어요. 레베카는 계속해서 그런 기획을 하고 있죠. 이전에는 배와 인터넷을 이용했고, 그다음이 드론, 다음이 로봇인 거예요. 한국이 디지털 강국이라는 얘기를 듣고 즉흥적으로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그 시기 즈음 ‘페미당당’(페미니스트 단체)이 임신중단 유도약 자판기를 설치하고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걸 레베카가 외신을 통해 봤어요. 이런저런 계기로 ‘한국에 가자’는 말이 나오게 됐죠. 레베카가 한국에 와 강연도 하고 광화문 앞에서 임신중단 시위도 함께 했어요.

로봇 아이디어는, 로봇의 등에 임신중단 약을 붙이는 거예요. 약을 전해주는 게 사람이 아닌 로봇이라 책임소재가 없는 거죠. 다만, 약을 처방해준 건 (임신중단이 합법인) 네덜란드 의사예요. 환자가 원격 의료를 통해 약을 처방받아 먹어도 된다고 한다면, 법을 위반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중단을 도울 수 있는 거죠. 저희는 거기서 영감을 받아 레베카에게서 받은 약을 125명이 동시에 먹는 퍼포먼스를 했어요. 그 속에는 진짜 약을 먹은 사람도 있고, 비타민을 먹은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임신중단 약을 몇 명이 먹었는지는 몰라요. 125명이 갖는 의미는, 한국에서 1시간에 그만큼의 수가 임신중단을 한다는 것이죠.



-도서 집필을 위해 프랑스, 네덜란드, 아일랜드, 루마니아, 폴란드 등을 다녀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봄알람 멤버들과 시칠리아로 휴가를 가자는 얘기를 했었어요. 그랬더니 ‘시칠리아? 시칠리아는 유럽이지. 유럽은 레베카 곰퍼츠. 레베카 곰퍼츠? 낙태. 낙태는 프랑스!’ 이런 식의 로직으로 연결됐어요. 프랑스는 임신중단에 관한 투쟁의 역사가 있는 나라예요. 또 폴란드는 여행을 갔던 시기에 검은 시위가 있었죠. 폴란드 여성에 대한 억압적 정책, 예를 들어 ‘유산해도 감옥 갈 수 있다’는 것이 여성들의 투쟁에 불을 붙였고 이게 검은 시위로 이어졌어요. 프랑스, 폴란드에 이어 아일랜드는 당시 헌법 8조를 빼는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 조항은 태아에 시민권을 부여하는 가톨릭 문화에 따른 규정인데, 이 조항이 임신중단을 살인죄로 처벌받게 만들어요. 그리고 네덜란드는 임신중단권에 있어서 미래를 상징하는 나라라고 생각했고 루마니아까지 포함해 임신중단과 관련된 5개국을 생각했죠. 각 나라를 방문해 활동가들을 만나보기로 하는 기획이 그렇게 완성됐어요.

책의 제목이 『유럽 낙태 여행』인데 ‘유럽’ ‘낙태’ ‘여행’이 남자들이 다 싫어하는 거예요. 여행하는 여성에 대한 금기가 역사적으로 있었어요. 역사적으로 길 위의 여성은 성매매하는 여성, 주인 없는 여성, 천박한, 방탕한, 남성들이 함부로 해도 되는 여성을 의미했고 자유로운 여성, 길 위의 여성을 단속했죠. 이처럼 움직이는 여성을 통제하는 역사가 있었고, 임신중단도 결국 여성들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임신중단 컨셉으로 여행하자는 기획을 하게 됐죠. 우리의 몸이 이동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담았어요. 국경이 바뀌면서 내 몸이 합법이 되거나 불법이 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죠. 이동성과 시간성, 법 때문에 여성의 몸이 자유로워지기도 하고 단속이 되기도 하는 것을요. 저희가 2018년 7월에 책을 냈는데, 이는 한국의 역사성과 맞닿아있어요. 책을 기획했던 즈음 낙태죄 폐지 운동이 시작됐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운동을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담론을 더 키우는 역할로 책을 냈고 역사적 표지가 될 수 있게끔 족적을 남기자는 의미였죠.

-올해 4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습니다. 그에 따라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 조항을 개정해야 하는데요. 헌재에서는 임신중절 허용 임신 초기 기간을 ‘임신 22주 내외’로 설정했고, 정의당 이정미 의원은 14주까지는 임산부의 요청만으로, 14~22주까지는 태아의 건강상태와 사회경제적 사유로 중절이 가능하도록 하는 법안을 내놓았죠. 이정미 의원의 법안이 후퇴한 법안으로 읽혀 논란이 됐었는데요. 혹시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그리고 한국에서 어떤 법안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어떤 법이 좋고 나쁘다기보다는, 제가 계속 주지하는 건 임신중단이 합법이 된다고 다가 아니라는 게 첫 번째예요. 두 번째는 이정미 의원이 말했던 14주, 24주가 문제적이라는 거죠. 한국은 임신중단 하려면 할 수 있어요. 돈만 내면. 돈이라는 것에서 계급 격차가 나타나 형평성이 달라지지만, 한국은 아일랜드처럼 임신중단을 할 수 없는 나라는 아니에요. 반면 아일랜드는 ‘이 땅에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죠. 아일랜드에서 일하는 사람은 임신중단을 하려면 그 땅을 떠나서 하고 와야 해요. 이 땅에 피를 묻히지 말라는 법을 갖고 있죠.

임신중단 관련 클리닉에서 임신중절을 해야 하는 법도 있는데, 그건 모체를 보호한다는 명목을 갖고 있어요. 결국 누가 재생산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냐는 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봐요. 여성들이 계속 저항해야 하는 이유죠. 여성에게 실제적인 걸림돌이 되는 것이 ‘모체를 보호한다’는 명목이에요. 현재 이탈리아 활동가들이 환장하는 포인트가 뭐냐면, 임신중단이 합법인데 (의사들의) 양심상 거부가 가능하니까 병원 문 10곳을 두드리면 9곳에서 거절당해요. 어떤 명목으로 법을 만드냐에 따라 여성의 삶을 제약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임신중지』라는 책을 보면 서구에서도 모체를 보호한다는 명목을 두고 어떻게 싸우는지 나와요. 14주가 논란이 된 것도 이런 이유죠. 오히려 임신중단이 합법화되면서 14주로 명확히 기준선이 그어지면 여성들이 손 쓸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날부터 14주가 주어지는 게 아니고 지난 생리 때부터 14주가 주어지는 거니까 고민하는 시간이 촉박해지는 거죠. 난점들을 계속 따져보면서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싸움에 임할 수 있다고 봐요.



-임신중단 약인 미프진 수입이 아직 안 되고 있습니다.

위민온웹(임신중단이 불법인 나라의 여성들을 위해 인터넷 상담 후 국제우편으로 임신중단 유도약을 보내주는 국제 비영리단체, 레베카 곰퍼츠 설립) 한국 계정이 있어요. IP 우회하면 사이트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작년에 위민온웹 기부금 1위가 한국이었어요. 한국이 디지털 리터러시가 높고 페미니즘 무브먼트를 이끄는 주체가 가임기 여성과 맞닿아있어요. 그런 여러 상황이 맞물려서 그런지 기부금도 1위를 했죠. 위민온웹 통해서 임신중단 약을 가장 많이 구하는 나라가 한국이 된 거예요.

-임신중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여전한데요. 한국사회는 어떤 교육을 해야 하고, 또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이 있을까요?
교육에서 일단 ‘임신중단은 괜찮다’고만 해도 양반이에요. 이성애 섹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해요. 여성 건강에서 제일 위험한 게 남성과의 섹스라고 해요. 이성 간 섹스. HPV 감염도 그렇고. 전 세계 이성애 규범성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요. 단순히 ‘임신중단 괜찮아!’라고 하는 서구의 담론에서 더 나가야 합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이성 간 섹스 정말 괜찮나?’라는 것이에요. 성관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묻고 싶고, 여성이 어떤 걸 감수하는지 파고들고 싶어요. 이성 간 섹스는 여성의 쾌락과 얼마나 가까운가.

이성간 섹스를 자연화하는 가부장제 교육기관은 기존의 제도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해요. 재생산할 것이라면 임신중단에 대한 낙인화를 멈추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여성에게 안기는 죄책감은 당연히 탈피해야 하고, 임신중단 이후 많은 여성이 안도감을 느낀다는 담론이 퍼져야 해요.

한국사회는 모성에 대한 숭고함보다는 섹스한 여성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모욕감이 더 큰 것 같아요. 그에 대한 담론적 투쟁이 더 필요하죠. 보통 ‘나 누구랑 잤어’라는 말은 할 수 있지만 ‘나 낙태했어’라는 말은 하기 어려워요. 왜 그럴까요? 그냥 섹스는 괜찮은데 낙태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섹스는 왜 나쁘게 생각할까요? 남자친구와 한 섹스와 낙태라는 결과를 만들게 된 섹스라는, 이 이상한 이분법을 깨야 하고 대중들이 이에 대해 계속 말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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