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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여성들의 삶과 단호한 얼굴이 있는 곳

마르지예 메쉬키니 <내가 여자가 된 날>

손시내|영화평론가 / 2020-05-14


< ZOOM IN >에서는 여성 영화, 감독, 배우, 캐릭터 등을 퍼줌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망설이지 말고, 페미니즘 돋보기!

<내가 여자가 된 날> 스틸컷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그러니까 새로운 세기의 초입에 이란 테헤란 출신의 여성 영화감독 마르지예 메쉬키니가 그의 첫 영화인 <내가 여자가 된 날>(2000)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그해 베니스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서 상영되며 신인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부문을 비롯해 3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고, 이후에도 토론토, 시카고, 부산 등의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이 영화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메쉬키니가 영화를 배운 ‘마흐말바프 영화학교’를 간단히 살펴보는 편이 좋겠다. 

1996년, 메쉬키니의 남편이자 이란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영화제작을 잠시 중단하고 영화학교를 세웠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 큰딸 사미라에게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직접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그 학교의 학생은 당시 16살이던 사미라와 그의 동생인 메이삼과 하나, 그들의 몇몇 친구들 그리고 메쉬키니까지 8명이었다. 이들은 영화학교에서 영화에 관한 실무적이고 이론적인 훈련뿐만 아니라 음악과 미술, 철학, 체육 등을 폭넓게 익히며 함께 공부했다. 또한 마흐말바프 가족은 ‘마흐말바프 필름 하우스’라는 제작사를 따로 마련해 가족들의 모든 영화를 직접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은 국제영화제에서 중동지역의 현실을 널리 알리며 학교와 가족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현재 이들은 검열과 위협 등의 문제로 이란에서 지내지 못하고 망명해 영국에서 살고 있다.)

<떠돌이 개> 스틸컷

학교 프로그램을 지속하는 동안에도,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난 이후에도 다섯 명의 가족들은 서로의 영화에 프로듀서, 시나리오, 편집, 조연출, 스틸사진 작가 등으로 참여하며 함께 영화를 만들어왔다.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 중동의 전쟁과 빈곤, 여성이 처한 현실 등이 언제나 이들 영화의 소재가 되었고, 한 편의 영화는 다음 영화로 또 그 다음 영화로 연결되고 확장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사미라 마흐말바프는 <오후 5시>(2003)라는 영화에서 탈레반 정권 이후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교육권과 자유에 대해 다뤘다. 이 영화의 제작을 함께 했던 하나 마흐말바프는 캐스팅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광기의 즐거움>(2003)을 만들었고, 마르지예 메쉬키니는 영화의 자료 조사와 제작을 도우며 알게 된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이야기를 토대로 두 번째 장편 <떠돌이 개>(2003)를 만들었다. 이후 2007년, 하나는 학교에 가고 싶은 아프가니스탄의 6살짜리 여자아이의 여정을 담은 <학교 가는 길>을 찍었고, 메쉬키니는 이 영화에 각본으로 참여했다. 이처럼 마흐말바프 가족의 여성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서로에 대한 연대감을 바탕으로 영화 작업을 해왔는데, 사미라와 하나에 대해선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길 바라며 마르지예 메쉬키니의 첫 번째 작업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마르지예 메쉬키니는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사과>(1998)와 <칠판>(2000),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고요>(1998)와 <문>(1999) 등에서 조연출을 하다가 2000년에 자신의 첫 영화를 찍었다. <내가 여자가 된 날>은 메쉬키니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일종의 졸업 작품으로,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쓴 각본에 메쉬키니가 세부적인 부분과 대사를 덧붙였고 세 명을 제외하곤 대부분 비전문 배우와 함께 작업했다. 영화는 이란 남부에 위치한 키쉬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 편의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다. 제목이 알려주듯이 이란에서 여자가 된다는 것,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현실적이고도 은유적인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어린 여자아이, 결혼한 젊은 여성 그리고 노년의 여성이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다. 이들 각각의 이야기는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느슨하게 묶이는데, 무엇보다도 미지의 가능성 혹은 잡히지 않는 희망처럼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의 풍경 자체가 이 여성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소다. 

<내가 여자가 된 날> 스틸컷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하바. 오늘 9번째 생일을 맞은 여자아이다. 바닷가 근처 마을에 살고 있는 하바는 친구인 하산과 함께 놀고 지붕에 올라가 바다를 보는 것도 좋아하는 활달한 아이다. 그런데 어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오늘, 할머니와 엄마로부터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듣는다. 이제 아홉 살이 되었으니 남자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말고 차도르를 써서 머리카락을 감춰야 한다는 것. 하바의 할머니는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가자고 찾아온 하산을 내쫓기까지 한다. 오늘까지는 놀게 해주고 싶은 엄마의 은근한 지원에 힘입은 하바는 정오까지 1시간을 벌게 되지만, 하산은 그새 자기 방에 갇혀 숙제를 하고 있다. 할머니가 시간을 가늠하라며 알려준 막대기의 그림자는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점점 짧아지고 하바는 애가 탄다. 바다에 나가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가 창문 너머로 하산과 사탕을 나눠먹기도 하는 사이에 그림자는 사라지고 하바의 차도르도 완성된다. 그렇게 하바의 한 시절이 함께 끝난다.

두 번째는 아후의 이야기다. 한 남자가 말을 타고 달리며 아후를 소리쳐 부르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니 해안가에 무언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검은색 차도르를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있는 한 무리의 여성들이다. 남자는 다름 아닌 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후의 남편. 그는 자전거에서 당장 내리라며 아후를 다그치지만, 아후는 멈출 생각이 없다. 그저 길 위에서 함께 달리는 이름 모를 여성들 사이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온힘을 다해 나아갈 뿐이다. 남자가 순순히 물러나는가 싶더니 곧 성직자를 데려와 그 자리에서 이혼하겠다며 협박한다. 그런데 아후는 이번에도 단호하다. 그럼 이혼하자는 식이다. 그 다음엔 집안의 남자 어른들이 말을 타고 달려와 아후에게 소리친다. 이혼은 집안의 수치라고, 자전거는 악마의 수단이니 당장 거기서 내려 너의 삶으로 돌아가라고. 아후는 이번에도 결연한 얼굴이다. 그의 삶은 여기에, 자전거를 타는 길 위에 있는 것만 같다.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경주는 계속되지만, 이내 아후를 앞질러 간 어느 여자의 시야에 담기는 건 결국 남자들 때문에 멈춰버린 아후의 모습이다.

<내가 여자가 된 날> 스틸컷

마지막 주인공은 후라다. 방금 비행기를 타고 섬에 도착한 그는 혼자서는 걷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 나이든 여성이다. 후라는 공항 앞에서 일감을 기다리던 소년과 함께 백화점을 돌며 살림살이를 장만하기 시작한다. 냉장고, 욕조, 주전자, 거울, 소파…. 손가락에 매단 알록달록한 천 하나하나마다 사야 할 물건을 생각해 놓았다는 그는 이 물건들이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평생 가져본 적 없는 나만의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해변에 온갖 살림살이를 잔뜩 늘어둔다. 마치 집을 펼쳐놓은 것처럼. 후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소년들이 놀이를 시작하면, 이곳은 잠깐 마법의 세계가 된 것처럼 풍요롭다. 그 다음은 더욱 놀랍다. 소년들이 석유통을 엮어 만든 뗏목에 물건들을 가득 실은 후라가 물결이 넘실대는 바다로 떠나는 것이다. 거기엔 하바가 뒤집어쓰고 있던 검은 스카프로 돛을 단 뗏목도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하바가 보고 있다. 후라에게 아후의 이야기를 전해준 두 명의 여성도 손을 흔들며 후라를 배웅한다.

세 명의 여성에겐 모두 시간의 제약이 있다. 하바에겐 막대기의 그림자가 점점 짧아지는 한 시간이, 아후에겐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있는 경주의 시간이 주어져있고, 후라에겐 얼마 남지 않은 인생 그 자체가 있다. 아마도 이 시간의 제약은 그 자체로 이 여성들이 직면한 삶의 제약일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그 제약이 곧 영화의 제약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하바의 한 시간에, 아후의 자전거 타는 시간에, 그리고 후라가 소망해왔고 이제는 많이 늦어버린 그 시간에 함께 몰두하며 제한된 시간 자체를 영화의 시간으로 받아들여 활성화하고, 바로 거기에 이 여성들의 삶이 있다고 말한다. 그 제한된 시간이 다하면 영화 또한 곧 끝나버리고 마는데도 말이다. 영화는 현실을 고발하거나 무언가를 당장 깨뜨리기보다는 그렇게 여성들이 실제로 겪어야 하고 살아가야 하는 제약 속의 단호한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이 바라보는 바다에 시선을 던진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는 아름답고도 서글픈 감정이 공존하며, 또한 슬픔 속에 희망의 눈짓이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떠돌이 개> 스틸컷

메쉬키니는 재혼을 했다는 이유로 엄마가 감옥에 갇혀 떠돌이 신세가 된 두 아이들의 로드무비인 두 번째 영화 <떠돌이 개>로 2003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을 받았고, 2009년엔 모흐센 마흐말바프와 함께 소련의 붕괴가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다룬 <눈과 함께 온 남자>를 공동 연출했지만, 그 이후로 연출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새로운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다. (또한 이 두 편의 영화는 안타깝게도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 적이 없다. 다만 <내가 여자가 된 날>은 한글 자막이 있는 DVD를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메쉬키니는 여전히 모흐센과 함께 편집과 각본 작업을 하고 있고, 지난해엔 그가 각본에 참여한 마흐말바프 필름 하우스의 신작 <마르게와 엄마>(2019)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기도 했으니, 멀지 않은 날에 곧 그의 새 영화를 볼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져 보아도 좋을 것이다. 더불어 중동 지역을 거점으로 꾸준히 작업하고 있는 여성 감독들이 소개될 기회도 많이 만들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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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영화웹진 리버스 필진,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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